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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행

일본기차여행의 백미, 에키벤의 마력

 

 

 

 

 

일본 기차 여행의 백미, 에키벤의 마력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③

 

 하카타역의 명물, 크루아상을 파는 가게. 이른 아침에는 손님이 뜸하지만 평소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튿날 아침, 호텔을 나섰다. 이제 본격적인 여행이다. 신칸센을 타고 첫 여행지 구마모토로 가야 한다. 조금 서두른 탓에 하카타역에는 일치감치 도착했다. 개찰구를 통과하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이 가게에서 파는 크루아상은 플레인(158엔), 초코(179엔), 사쓰마이모(고구마, 189엔) 세 종류로 맛이 뛰어나 인기가 많다.

 

전날 긴 줄이 늘어서 있던 크루아상 가게(일 포노 델 미뇽)였다. 아내가 긴 줄을 보고 이 가게가 하카타역의 명물이라고 했다. 향긋한 냄새 때문에 한 번 맛보지 않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란다.

 

 

어제의 긴 줄과는 달리 아침이어서인지 손님은 두서넛뿐이었다. 일단 플레인, 초코, 사쓰마이모(고구마) 세 종류만 있는 메뉴에서 한 개씩을 골라 개찰구로 들어갔다.

 

▲  승강장 바닥의 탑승 번호까지 확인 후 에키벤을 구경했다.

 

기차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승강장까지 미리 가보기로 했다. 이렇게 치밀한 여행은 처음이다. 일본어라고는 “스미마셍”밖에 모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숙소와 교통편을 다 예약하고 난 아내가 어느 날 문득 걱정이 되었는지 “정말 우리 일본 갈 수 있을까?” 하고 넌지시 불안감을 드러냈다.

 

▲  하카타역 구내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명란젓

 

난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으니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세요, 하는 눈빛으로 여행자 특유의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의 묘안을 말했는데, 이를 듣고 아내는 자지러질 정도로 웃더니 그 뒤로는 일본 배낭여행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음, 만약에 일본에 가서 어디를 찾아가는 게 힘들면 좋은 방법이 있지. 기차 정도는 탈 수 있겠지. 간단해.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 있는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기차로만 이동하는 거지. 만약 여행지로 가는 길을 물을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면 어떻게든 숙소만 찾으면 되는 거지. 꼭 우리가 어디를 가야한다는 건 없잖아. 그렇게 며칠 있다가 돌아오면 되는 거야. 기차만 탈 줄 알고 비행기만 탈 줄 알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지. 기차로 이동하는 숙소 여행인 셈이지. 하하.”

 

 

 하카타역의 에키벤을 파는 가게. 하카타역에만 네댓 곳이 있었다.

 

기차만 정확히 타면 아무리 일본말을 한마디 못하는 우리라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는 것이다. 여행을 포기하더라도 어떻게든 숙소만 찾아가면 되니까. 근데 기차를 놓칠 경우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아마 “스미마셍”으로는 해결 안 될 복잡한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기차역에 일찍 나와서 미리 확인해보는 바지런을 떨었던 것이다.

 

 일본의 기차와 기차역에서 유통하는 에키벤은 그 종류만 2,500가지가 넘는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승강장 바닥의 ‘사쿠라 8호차’ 탑승 번호까지 확인한 우리는 더운 열기를 피해 휴게실로 다시 내려왔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그때까지 못 봤던 것이 눈앞에 펼쳐졌다.

 

 규슈에서만 총 14개 노선, 34개 역에서 110종이 넘은 에키벤을 판매하고 있다. 가격대 역시 400~1,500엔으로 다양하다.

 

 

종류만 2,500가지, 에키벤의 마력

‘에키벤’이었다. 역에는 에키벤을 파는 가게만 해도 네댓 곳이 있었다. 가게마다 수백까지의 화려한 도시락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규슈에서만 총 14개 노선, 34개 역에서 110종이 넘은 에키벤을 판매하고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가격대 역시 400~1,500엔으로 다양했다.

 

 유후인 노모리에서 먹은 해물 덮밥 에키벤

 

‘에키벤(駅弁)’은 ‘에키우리벤토(駅売り弁当, 역에서 파는 도시락)’의 준말이다. ‘에키’는 ‘역’을 뜻하고 ‘벤’은 ‘도시락’을 가리킨다. 즉, 기차역이나 기차 안에서 파는 도시락이다. 최초의 에키벤은 1885년에 주먹밥과 단무지를 넣어 판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 철도가 개통된 것이 1872년이니 100년이 넘게 일본 철도의 역사와 함께한 셈이다.

 

 유후인 노모리에서 먹은 해물 덮밥 에키벤

 

에키벤은 그 종류만 해도 2,500종 이상이다. 에키벤이 특별한 것은 기차역마다 지역의 특산물을 음식재료로 삼거나, 그곳만의 특색 있는 메뉴로 만든다는 점이다. 역에서 파는 에키벤의 메뉴만 봐도 그 지역에 어떤 음식이 유명한 지를 눈치 챌 수 있다.

 

 유휴인 노모리에서 먹은 화려한 에키벤, 가격은 930엔(약 9,200원)이다.

 

이 정도면 에키벤은 단지 기차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중요한 요리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인 도시락을 이토록 다양한 메뉴와 화려한 장식, 뛰어난 상품성을 가진 새로운 음식문화로 창출하는 그들의 능력에 탄복한다.

 

 유휴인 노모리에서 먹은 화려한 에키벤, 가격은 930엔(약 9,200원)이다.

 

에키벤을 맛본 것은 유휴인 노모리에서다. 여행 4일째 되던 날 유후인에서 하카타로 돌아오는 기차(유후인 노모리) 안에서 도시락을 주문했다. 승무원은 도시락이 남은 게 없다고 했다. 저녁때에 맞추어 식사를 할 생각으로 기차가 유후인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주문한 게 사달이 났다. 이미 다 팔린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 칸에 갔다 온 아내의 손에 도시락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승무원은 당황하는 낯빛이 역력했고 급기야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사과를 했다.

 

 하카타역과 유휴인역을 오가는 관광열차인 유후인 노모리에서 다양한 에키벤을 먹을 수 있다.

 

화려한 도시락 디자인에 확 눈길을 빼앗겼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을 때 예쁘게 담긴 도시락 내용물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화려한 색감, 다양한 구성, 앙증맞을 정도의 꾸밈과 정성은 먹기에 아까울 정도였다. 물론 대개의 일본 음식처럼 에키벤도 한국 음식에 비해 달고 짠 편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 입맛에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에키벤으로 만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경연대회까지 열려

에키벤은 종류도 다양할뿐더러 구성과 가격, 디자인도 다양하다. 심지어 에키벤은 만화책으로 나왔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국내에서도 만화 <에키벤>이 번역되어 판매되고 있다. 만화 <에키벤>은 도시락집 주인이자 철도 마니아인 주인공 다이스케가 아내에게 선물 받은 기차표로 일본 일주 기차 여행을 떠나면서 일본의 각 지역별, 기차역마다의 명품 에키벤들과 일본 기차 여행법을 소개한 철도 도시락 여행기이다. 지금까지 규슈에서 간토 편까지 15권, 대만과 오키나와 1편까지 합쳐서 총 16권이 출간됐다.

 

▲  만화 <에키벤> 표지.

 

<에키벤>의 1권이 규슈 편으로 지역특산물을 살려 만든 고등어초밥 도시락(오이타역), 돈코츠 도시락(가고시마 중앙역), 명란젓 도시락(모지역), 영주님 도시락(구마모토역), 싯포쿠 도시락, 카쿠니 도시락(나가사키역), 현해탄 치라시초밥(하카타역), 숲 도시락(유후인 노모리) 등 규슈 각지의 에키벤이 소개되고 있다.

 

▲  만화 <에키벤> 내용 일부.

 

대개 먹는 사람 앞에서 항상 조리되는 것이 일본 요리의 특성 중의 하나라면 에키벤은 상당이 이색적인 음식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재료를 섞지 않고 그 원래 상태를 부각시키는 일본 요리의 특징이 에키벤에도 있다. 하나의 음식 속에 계절이 함축되어 있고, 미적인 것도 보여주고, 지역의 특성을 드러내고, 각 요리가 어우러져 맛에 일관성도 갖춘 음식. 맛, 정성, 의미가 듬뿍 담긴 <에키벤>은 예쁘기까지 해서 마치 꽃을 보듯 설렘이 있다.

 

다양성과 지역성, 계절성이 있는 에키벤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을 함께 주어 설레고 들뜨게 한다. 에키벤을 먹기 위해 부러 기차역을 찾거나 기차를 탄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에키벤은 인기가 많다. 기차 이용객뿐만 아니라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매년 에키벤 경연대회도 열리고, 에키벤을 먹으며 일본 곳곳을 여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큰 인기가 있다고 한다. 에키벤은 분명 매력을 넘어 마력을 가진 일본의 독특한 음식문화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에도 일부 기차에서 도시락을 팔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을뿐더러 먹고 싶어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끼니를 때우는 정도로 여긴다. 게다가 지역의 특징이 담긴 음식이 아니라 그냥 일률적인 메뉴이다. 다양한 메뉴의 개발과 상품성, 지역성을 갖춰 지역경제와 기차 여행 활성화, 음식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역의 특산물과 스토리를 엮은 스토리텔링 전략에 대한 깊은 고민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지극히 소소하고 평범한 소재에서 새로움과 변화를 읽어내어 그것을 상품화하고 이슈화시키는 능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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