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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행

일본 성에만 볼 수 있는 천수각, 그 놀라운 방어력

 

 

 

 

 

 

일본 성에만 볼 수 있는 천수각, 그 놀라운 방어력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⑤-2, 구마모토 성

 

 천수각으로 가려면 혼마루 어전의 지하통로인 구라가리쓰로를 통과해야 한다.

 

구마모토 성의 중심, 천수각으로 간다. 혼마루 어전의 지하통로인 구라가리쓰로를 통과하면 천수각이다. 왼편에 혼마루 어전이 있고 그 옆 하늘로 우뚝 솟은 천수각은 가히 위압적이다.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높이가 무려 30m가 넘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축소 지향의 일본의 또 다른 이면이다.

 

 

천수각에 오르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공간도 그러하거니와 층계도 가팔라진다. 그러나 그도 잠시, 천수각 위에 서면 성내뿐만 아니라 구마모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천수각이 일본 성의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천수각 위에 서면 성내뿐만 아니라 구마모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수각은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높이가 무려 30m가 넘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일본 성의 상징, 천수각의 놀라운 방어력

 

일본 성의 두드러진 특징을 꼽으라면 단연 천수각(덴슈가쿠, 天守閣)이다. 천수각이 처음 생긴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비와 호 동쪽의 아즈치 산에 아즈치 성(시가 현)을 지을 때라고 한다. 천수각은 망루와 비슷한 건물로 대개 혼마루에 건립된 경우가 많다. 천수각 밑은 천수대라는 성벽이 받치고 있으며 천수의 크기에 따라 소천수, 중천수, 대천수 등으로 불린다.

 

 천수각은 망루와 비슷한 건물로 크기에 따라 소천수, 중천수, 대천수 등으로 불린다.

 

일본의 성은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중심으로 성곽을 세운 뒤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이중 삼중으로 성을 에워싸는 모양새다. 천수각은 성의 안팎뿐만 아니라 먼 곳까지 적의 동태를 두루 볼 수 있고, 무사를 배치하거나, 명령을 하달할 때나, 전법을 펼칠 때 등 무엇보다 방어에 유리하다.

 

 

성벽 하나로 둘러싸여 성벽이 뚫리면 곧장 무너지는 우리나라 성과는 달리, 일본의 성들은 겹겹이 둘러싼 성벽으로 인해 하나하나 공략하지 않으면 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 그만큼 방어하기에 좋은 구조이다. 실제로 이곳 구마모토 성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고,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들이 남해안 일대에 쌓은 왜성도 조명 연합군에게 함락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임진왜란 후 우리나라 축성술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성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성벽에 돌출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다. 일종의 ‘치(雉)’인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달라붙는 적들을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어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지은 구마모토 성에선 돌출 구조물인 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구마모토 성의 영원한 주인, 가토 기요마사

 

구마모토 성을 이야기할 때 가토 기요마사는 늘 따라 다닌다. 우리와는 악연인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구마모토 번의 초대 영주가 되었는데,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 시즈가타케의 싸움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큰 공을 세웠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가토 기요마사 등 7명의 무장들을 시즈카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지은 구마모토 성에선 우리나라 축성술의 영향인 돌출 구조물 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1587년 규슈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삿사 나리마사를 히고(지금의 구마모토 현)의 영주에 임명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고를 무시하고 삿사 나리마사는 엄격한 토지 조사와 공물 징수를 했다. 이에 토호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삿사 나리마사에게 할복을 명하고 반란에 참여한 토호와 농민들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후임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기용하여 히고를 남북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정유재란 때 일본왜성에서의 뼈아픈 기억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내에 무려 120개가 넘는 우물을 팠다.

 

구마모토의 초대 번주가 된 가토 기요마사는 1601년 구마모토 성을 쌓기 시작하여 1607년에 완공했다. 특이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가 성을 쌓으면서 정유재란 당시 울산왜성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경험을 교훈 삼았다는 것이다. 울산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조명연합군에 포위되어 식수와 군량미가 다 떨어져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 목숨을 부지하다 겨우 탈출에 성공했던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 일을 교훈 삼아 구마모토 성내에 무려 120개가 넘는 우물을 파고, 수백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다(이로 인해 구마모토 성은 ‘은행 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천수각 안의 다다미를 먹을 수 있는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한다.

 

 

이처럼 구마모토 성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가토 다다히로가 2대 성주가 되지만 지도력이 약했던 그는 결국 물러나게 되고 이후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구마모토 성의 성주가 된다. 이때부터 구마모토 성은 메이지 유신까지 호소카와 가문이 다스리게 된다.

 

 

 

이처럼 에도 시대까지 구마모토 번을 호소카와 가문이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구마모토 성 하면 가토 기요마사를 자연 떠올리는 모양이다. 세이난 전쟁에서 성의 천수각이 불타게 되자 주민들은 "세이쇼 공(清正公)의 성이 불타고 있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구마모토 성을 공략하지 못한 사이고 다카모리도 "우리는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다, 세이쇼 공에게 진 것이지."라고 했을 정도였다.

 

 

 일본의 성은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중심으로 성곽을 세운 뒤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이중 삼중으로 성을 에워싸는 모양새다. 그림의 제일 뒤 가장 높은 곳이 천수각이다.

 

천수각의 안에는 가토 가문, 호소카와 가문, 세이난 전쟁 때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천수각 안에서 여행자의 눈길을 끈 동상 하나. 군복을 입은 늠름한 젊은이다. 한자로 ‘谷村計介’라 쓰여 있다. 누구일까. 여행 당시는 끝내 알지 못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가 누구인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어를 아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의 이름이 타니무라 게이스케라고 했다.

 

 일본의 성은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중심으로 성곽을 세운 뒤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이중 삼중으로 성을 에워싸는 모양새다.

 

타니무라 게이스케는 군인으로 1853년 미야자기 현에서 태어나 1877년 구마모토 현에서 죽었다. 1874년 사가의 난에 출정하여 궁지에 빠진 군대를 구했고 이후 타이완에 출병했다. 1877년 세이난 전쟁 때 앞서 말한 사이고 다카모리 군에 의해 구마모토 성이 포위되자 야음을 틈타 탈출하여 정부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틀 뒤에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용감무쌍한 공이 인정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비가 건립됐고 국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지원군에게 연락 업무를 완수한 것을 기려 백성의 모습으로 동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군복 차림의 동상이다.

 

 천수각 안의 타니무라 게이스케 동상

 

'무샤가에시 武者返し‘, 구마모토 성의 난공불락의 성벽을 이르는 말이다. 밖으로 나와 다시 천수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성주가 살았던 화려한 혼마루 어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수각에서 내려다본 혼마루 어전과 구마모토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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