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선술집에서 완두콩을 주문하는 완벽한 방법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②-2
일본에서의 첫 식사를 마친 우리는 맛보다는 식당과 메뉴를 우리 힘으로 선택했다는 성공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뻔뻔스럽게도, 우리의 눈썰미 때문이 아니라 한글 메뉴판 덕분에 쉽게 음식을 주문하고 먹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진실을 깨달은 건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 하카타로 돌아와서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술집에 갔을 때였다.
▲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선술집을 찾았다.
사건의 발단은 무모한 용기 때문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스미마셍’ 하나로 북규슈 일대를 아무런 문제없이 여행한 우리는 넘치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여행을 잘 했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자축하는 의미로 술집을 찾기로 했다.
▲ 역시 '나마비루(생맥주)'는 맛있었다.
하카타역에서 지도를 보고 금방 호텔을 찾아내고 능숙하게 체크인을 한 후 적당한 술집을 찾아 나섰다. 근데 여태까지와는 달리 가게 간판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한글과 영어로 쓰인 간판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많던 관광객들도 보이지 않고 온통 일본어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눅까진 들진 않았다. 일단 술 ‘酒’자가 적힌 간판을 찾기로 했다.
▲ 손님 두엇이 앉아 있는 선술집의 내부 풍경.
한참 거리를 쏘다니다 적당한 술집 두 군데를 찾았다. 결국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현대식 술집을 뒤로하고 맞은편에 있는 일본의 선술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오픈된 주방의 바에 손님 두어 사람이 각기 앉아 있었다. 일본에서는 혼자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 기억났다.
▲ 우리를 당황하게 했던 선술집의 메뉴판.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좌석에 앉았다. 우리로 치자면 조금은 깔끔한 선술집 정도였다. 일단 메뉴판을 보았다. 예상대로 온통 일본어다. 이번에도 한국 메뉴판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노”였다.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 있는 메뉴판도 없다고 했다. 이쯤 되자 여행 내내 긴장한 적이 없던 우린 대략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 닭튀김.
일단 낯익은 한자로 메뉴가 무엇인지를 짐작해 보기로 했다. 자신(刺身)은 회일 테고, 계(鷄)자로 시작하는 것은 닭요리일 테고, 돈족(豚足)은 족발일 테고…. 근데 문제는 한자가 적혀 있지 않는 메뉴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 여행 전에 스마트폰에 깔아두었던 번역기 앱이 번쩍 떠올랐다.
▲ 교자.
“난데스까?”를 반복하며 질문을 퍼부은 후 앱에서 ‘니와토리’, ‘이카’, ‘교자’ 등의 일본어를 찾아 결국 몇 가지 안주를 주문하는데 성공했다. ‘덴푸라’인지 물었으나 아니라고 했던 닭튀김(니와토리), 교자로 통했던 만두, 오징어(이카 슈마이) 등이었다.
▲ 선술집에서 온갖 몸짓으로 주문에 성공한 오징어슈마이.
특히 딤섬의 일종으로 보이는 오징어 슈마이는 대박이었다. 그렇게 한참 웃으며 즐기고 있는데 기름기가 많은 음식들이라 어째 속이 느끼하니 니글거렸다. 맥주 안주로 뭔가 색다른 것이 필요했다.
▲ 역시 '나마비루(생맥주)'는 맛있었다.
이때 아내가 콩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근데 메뉴판에는 없었다. 우연히 다른 테이블로 나가는 걸 아내가 봤던 것이다. 껍질 채 삶은 완두콩이었다. 앱으로 일단 콩이 ‘마메’라는 걸 확인하고 주문하자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근데 껍질 채 삶은 콩이 아니라 낱개로 한 알씩 나오면 어떡하지.” 딴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종업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손가락으로 콩 껍질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콩이 여러 개 있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 아주 진지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콩 껍질 안에 콩이 여러 알 들어가 있다는 걸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동시에 소리를 냈다.
“두, 두, 두, 두, 오케이?”
“두, 두, 두, 두, 오케이.”
▲ 선술집에서 온갖 몸짓으로 주문에 성공한 완두콩.
종업원은 뜻밖의 제스처에 박장대소를 하더니 손가락으로 둥근 원을 크게 그리며 주방으로 갔다. 잠시 후 우린 껍질에 쌓인 짭짤하니 맛난 완두콩을 감격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 선술집 주인이 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인지 벽에 사진과 상장 들이 걸려 있었다.
우리 옆에는 두 여자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다. 우리의 우스꽝스런 해프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주방은 우리 때문에 웃음이 넘쳐났고, 종업원은 연신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튼, 즐거운 저녁이었다. 아, 근데 이 집 사방 벽에는 야구 선수들의 사진과 상장들이 많이 걸려 있다. 예사 집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 처음인데다 일본어를 못하는 우리로선 거기까진 물어볼 수 없었다.
▲ 선술집 주인이 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인지 벽에 사진과 상장 들이 걸려 있었다.
세상 어디를 막론하고 서민들의 왁자지껄한 술집에선 해방감이 든다. 여행을 왔다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이런 선술집만 한 곳이 또 있을까!
# 이상 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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