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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행

구마몬과 노면전차가 있는 구마모토 여행

 

 

 

 

 

구마몬과 노면전차가 있는 구마모토 여행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④

 

기차는 너른 평원을 달린다. 한국에서 규슈를 상상할 때와는 딴판이다. 규슈를 그저 조금 큰 섬이겠거니 하며 한국의 섬처럼 당연히 산악 지형이 많을 것이라 여겼었다. 마치 강화도나 진도를 가보지 않은 이가 비옥하고 너른 평야가 두 섬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하듯 말이다. 그러나 선입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규슈 신칸센의 객실. 규슈 신칸센은 후쿠오카(하카타 역)에서 남부의 중심 도시 가고시마까지 달린다.

 

5일간의 규슈여행에서 깨달은 것은 규슈가 경상도보다 훨씬 넓어(실제로는 두 배 정도 더 넓다) 실제 섬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옥한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는 곡창지대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이곳에 와서야 규슈가 왜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와 한반도, 중국, 유럽의 국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카타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의 풍경.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구마모토는 예부터 ‘불의 나라’ 또는 ‘비옥한 나라’로 불리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칼데라인 아소 산과 구마모토 평야가 있어 그렇게 불린 것이다. 동쪽으로는 아소 산을 비롯해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마모토 평야와 야쓰시로 평야가 해안까지 이어진다.

 

▲  숙소에서 본 구마모토 시

 

구마모토라는 이름은 ‘곰’이 아닌 ‘쌀’에서

나는 여행 내내 구마모토의 땅 이름에 집착했다. 원래 지명에 관심이 많기는 했다. 지명을 알면 그 지역의 반을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다. 근데 구마모토만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한자로 ‘웅본(熊本)’인데 왜 곰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지, 대개 현지에 도착해 보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산지보다는 너른 들판에 있는 구마모토의 평야와 시가지를 보며 곰의 고장이라는 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구마모토 역

 

그 의문은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여행이 끝나고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이던 끝에 겨우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구마모토라는 지명이 곰과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짐작은 예상대로였다.

 

‘구마’는 원래 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즉 구마모토는 쌀의 본고장이었다. 지금도 구마모토는 전 일본을 통틀어 곡창지대 중 하나이다. 예전에 ‘벼(稻)’를 ‘구마’로 읽은 데서 지명이 유래했던 것.

 

▲  구마모토 역내의 종합관광안내소. 이곳에서 노면전차와 버스 승차권을 구입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히고(肥後) 지역의 다이묘가 된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에 성을 쌓으면서 ‘곰 熊’자를 써서 오늘날의 구마모토가 된 것이라 한다. 다만,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히고 국으로 불리었으며 폐번치현(廃藩置県, 지방통치를 담당했던 번을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행정개혁) 때 구마모토 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에서 지명에 ‘구마’가 들어가는 지역들은 수리 시설이 잘 되어 벼의 생산이 많은 곳이란다.

 

 스이젠지 공원의 상가에 있는 구마몬

 

구마모토 시의 북동쪽에 있는 기쿠치 지방은 에도 시대에 곡창 지대로 알려졌으며, 기쿠치미(菊池米)는 반슈미(藩州米), 비슈미(備州米)와 함께 최고급의 품질로 여겨져 오사카의 경제 중심지인 도지마의 쌀 시세를 결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쿠치 강 하구 가까이의 다카세(지금의 다마나 시, 규슈 신칸센이 지나는 구마모토 역의 직전 역)도 구마모토 번 최대의 쌀 적출항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 셔틀버스에도 구마몬 캐릭터가 있었다.

 

재미있는 건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캐릭터인 ‘구마몬’이다. 곰 인형인데 구마모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다. 내가 묵은 호텔의 셔틀버스도 구마몬 캐릭터였다. 놀라운 건 구마모토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곰을 구마모토의 캐릭터로 만들어 이제는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마모토 역의 물품보관소. 사용료 500엔. 배낭을 이곳에 보관해서 가볍고 자유롭게 구마모토를 여행할 수 있었다.

 

노면전차 ‘트램’, 1일 승차권의 마법

9시 9분 하카타역을 출발한 신칸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9시 47분에 정확히 구마모토 역에 도착했다. 일본에 신칸센이 처음 들어온 건 1960년대였다. 1964년 10월 도쿄 올림픽이 열렸고 이때 토카이도 신칸센(東海道 新幹線)이 처음 개통되었다. 1959년에 착공하여 5년 만에 개통한 것이다. 당시에 시속 200km로 도쿄와 오사카를 주파했는데, 그 역사가 이미 반세기를 지났다. 규슈 신칸센은 후쿠오카(하카타 역)에서 남부의 중심 도시 가고시마까지 달린다.

 

 

구마모토 역에서 잠시 머뭇했다. 무더운 날씨에 묵직한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건 아무래도 고역이다. 예약한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올까 하다가 그 또한 번거로운 일이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품보관소를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물품보관소는 매표소 바로 옆에 있었다. 사용법을 몰라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한국말을 하는 노인 한 분이 안내를 자청했다. 자원봉사자로 보였다. 노인의 유창한 한국말에 우리는 금세 기쁜 낯빛이 되었으나 문제는 그 노인이 사용법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국 노인이 일본어로 적힌 사용법을 우리에게 읽어주었고, 우리는 이리저리 시도를 해서 마침내 배낭 셋을 보관소에 넣어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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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모토 노면전차의 1일 승차권. 승차권 안쪽 면의 네모난 은색 칸을 동전으로 긁어서 노면전차를 타는 ‘년, 월, 일’의 숫자를 드러내어 당일 승차권임을 표시한다.

 

다음은 구마모토의 명물 노면전차(트램)의 승차권을 구입해야 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 노면전차를 네댓 번은 이용할 것이라 1일 승차권을 사기로 했다. 역 구내 안내소에서 구마모토 시내를 하루 동안 400엔으로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1일 승차권(1Day Pass)을 구입했다. 승차권을 본 순간 우리는 마법에 걸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내소에서 이미 직원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겨우 기억을 더듬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다행히도 승차권에 안쪽 면에 영어로 쓰여 있는 사용법을 발견했다.

 

 구마모토 노면전차의 1일 승차권. 우리나라 즉석복권처럼 노면전차 타는 날짜를 동전을 긁어서 사용한다.

 

흥미로운 건 1일 승차권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승차권 안쪽 면의 네모난 은색 칸을 동전으로 긁어서 노면전차를 타는 ‘년, 월, 일’의 숫자를 드러내어 당일 승차권임을 표시하는 식이었다. 마치 복권을 긁듯 재미도 있을뿐더러 그 자체로 흥미로운 관광 상품이었다. 유효기간이 2년이나 되었는데, 그 기간 안에 하루 사용하는 방식이어서 종이 등을 절약하는 면도 있다. 노면전차는 A라인과 B라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구마모토의 노면전차는 A라인과 B라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진의 노면전차에 A라고 적혀 있다.

 

A라인 3번역 구마모토 역에서 우리의 첫 여행지인 10번역 구마모토 성까지는 모두 일곱 역을 거쳐야 했다. 구마모토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노면전차 승강장이 보인다. 유니폼을 입은 여승무원이 안내를 한다. 이 작은 ‘트램’, 한 칸밖에 없는 전차를 위해 최선을 다해 안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구마모토의 노면전차. 겨우 한 칸의 작은 전차임에도 유니폼을 입은 여승무원이 친절히 안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차에 올라타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노면전차는 현대 도시의 피로와 삭막함을 덜어줬다. 이 도시의 매력이 새롭게 다가왔다.

 

 노면전차를 운행하는 기사는 연신 안내방송을 했다.

 

오래된 것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오래 간직할 것으로 쓰임을 남겨두는 지혜로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 노면전차를 보며 떠올린 구마모토의 첫인상이었다. ‘검이불루(儉而不陋)’의 미학을 이곳에서 봤다면 과장일까. 퇴근길 시민들의 복장에서도 똑같은 인상을 받았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느린 트램은 과거와 현재의 공존, 오래된 미래를 읽을 수 있었다.

 

 

 A라인 3번역 구마모토 역에서 우리의 첫 여행지인 10번역 구마모토 성에 도착했다.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네 야시장에서나 들릴 법한 그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지속적이었다. 목소리를 좇아 트램 앞쪽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신호로 멈출 때만 목소리를 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규칙적인 듯한 사내의 목소리, 그 순간 딱히 왜 중얼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가 노면전차의 기사였으며 교통안내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구마모토의 노면전차는 현대 도시의 피로와 삭막함을 덜어줬다.

 

구마모토 역에 내렸다. 일본의 3대 명성,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에서 난 두 명의 역사적 인물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  오사카 성, 나고야 성과 더불어 일본의 3대 명성,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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