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자의 풍류와 멋

특출한 담장의 미학 '경주 독락당'

특출한 담장의 미학 경주 독락당
- 물 흐르는 소리에 마음을 씻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청재敬淸齋 이언적이 중종 33년인 1538년 3월에 청백리에 가자되자
그의 후손들이 청백은 공경지심
恭敬之心에서 나온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경주하면 으레 신라의 흔적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서라벌 천년의 영화가 너무 강렬하여 다른 흔적이 끼어들 틈은 없었단 말인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자옥산 기슭의 독락당.
경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국토의 외진 변방으로 물러난지도 한참 후에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한 한 선비의 고고한 정신세계의 자취가 남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락당獨樂堂 회재선생이 경주교관으로 있을 때 둘째부인과 함께 생활하던 별서이다.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어 담장 밖에서 손만 뻗어 대충 찍었다.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을 따라 회재晦齋라 하였다.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의 뿌리가 되는 이가 회재이며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으로 받들어져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가계는 미미한 선비 집안이었지만 외가쪽은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력을 갖춘
월성손씨 종가집이었다. 아홉 살 때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다
 그가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3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경주 향교에 부임하고부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락당의 담장 자연을 즐기기 위하여 살창을 만들어 계류를 완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말 특출한 발상이며 청류를 집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어느덧 자연과 하나가 된다..

당시 경주에서는 망기당 조한보와 이언적의 숙부인 망재 손숙돈 사이에 '태극론' 논쟁이 뜨거웠다.
이언적은 이들 사이에 오고간 글들을 보고 도가와 불교 색채가 가미되었다고 두 사람 모두를 비판한다.
이때부터 젊은 이언적은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중종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던 그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락당獨樂堂
이언적이 경주 향교 시절 둘째부인과 함께 생활하던 곳이다.
인근 양동마을에 본처가 있는 무첨당이 있었고 이곳 옥산동을 그는 더 즐겨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의 풍습이 그러했다 하니 크게 흠이 될만한 일은 아니겠다.

이후 김안로를 탄핵하다 파직을 당했던 이언적이 경주에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금과 같은 규모의 별서로 지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락당은 멀리서 봐도 페쇄적이다.
담장에 둘러싸인 집채도 지붕 끝만 보일 뿐이고 담장에 담장을 두른 폐쇄성은
그의 은둔생활을 집에 그대로 반영한 결과로 보아야겠다.

은둔자의 집답게 납작 엎드린 독락당에서
그는 좌절과 현실도피가 아닌 사유의 터전을 일구고 있었다.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워 조선에 토착화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그였지만
이곳에서의 중년기는 성리학적 테두리에만 얽매이지 않고
도가를 섭렵하는 등 인간적인 폭과 깊이를 더해간다.
 
그의 깊숙한 내면이 독락당에 그대로 표현된 듯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담장 밖으로는 맑은 계류가 사시사철 흐른다.
담장의 살창 사이로 보는 풍경이 이곳인데, 피서객으로 정신이 어지럽다.

대문을 들어 서면 너른 마당에 경청재敬淸齋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미로같은 담장에서 마주친 독락당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다.

담장 안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계정이 있다.
계곡을 내면으로 끌어 당기기 위해 정자의 앞쪽을 계곡으로 돌출시키고
반석의 생김새대로 기둥을 세워 2층의 누마루를 만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계정溪亭 독락당과 더불어 가장 눈에 띈다. 계곡으로 돌출되어 계류를 집안까지 끌어당기는 맛이 있다.
2층 난간에서 바라보는 계곡이 수려하다 하나 어처구니없게도 철조망으로 접근을 막았다.

물 흐르는 소리에 마음을 씻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천진한 본체를 홀로 즐긴다.

이언적은 비단 이곳 뿐만 아니라 4산5대四山五臺라 하여
은거시절 주위를 소요하였다.
자옥산 도덕산 무학산 화개산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 세심대 징심대가 그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