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 익숙해져야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까?
이놈의 사진을 찍고 난 뒤로 서두르는 버릇이 생겼다.
고약하다.
바람 부는대로 구름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도 좋았었는데......
오후 2시 55분.
나른한 봄날 오후 봄꽃들을 보며 철길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한 시간이 흘렀다.
멀리서 기차 경적 소리가 울린다.
때론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것, 이 재미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채미정採薇亭.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는 고사에서 이름을 붙였다.
채미정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선생을 모신 서산서원의 부속정자이다.
어계선생은 성균관 수학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함안에서 은거하였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 중일 때는 수시로 찾아 뵈었다.
단종이 금부도사의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자 급히 문상을 하러 청령포로 간다.
그러나 배가 없어 통곡을 하고 있으니 호랑이가 그를 등에 업어 건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채미정 백이숙제의 고사에 따라 지었다. '백세 청풍', 어계 선생의 맑은 정신이 엿보인다.
채미정 내에는 어계선생의 9대손인 조선의 유명한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의 현판도 있다.
어계선생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며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함안에서 낚시와 소요로 은거하였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단종을 연모하며 산 그를 사람들은 백이 숙제에 비유하였다.
서원 뒷산인 서산을 백이산이라고도 불렀다.
청풍대와 문풍루 청아한 바람에 몸을 씻고 마음에 귀기울여 보자.
개울 쪽으로 솟을 대문이 나 있다.
원래는 개울을 넘어 솟을 대문을 지나면
다시 작은 연못을 거쳐 채미정에 오를 수 있도록 드라마틱하게 되어 있었다.
솟을대문 앞으로 경전선 철도가 놓이면서 담장 옆 쪽문으로 드나들게 되었으니
옛 풍취는 사라져 버린 셈이다.
옛 풍류를 잃은 대신 기찻길이 채미정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찻길에서 바라본 채미정의 모습은 평온함 그 자체이다.
경적 소리에 아둔한 나를 깨우치며
사라져가는 기차에 옛 성현들을 그리워한다.
아이의 '까르르' 소리에 평온함을 느끼고
끝없는 철길에는 무상함이 밀려 온다.
마을길에서 만난 우물과 쉼터
꽃은 피고 지고
나는 길 위에 있다.
채미정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복원되었다.
스크랩과 보다 많은 여행기는
김천령의 Daum 블로그(http://blog.daum.net/jong5629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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