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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또 하나의 일상

만 원짜리 그림, 표구에만 오만 원 쓴 이유

 

 

 

만 원짜리 그림, 표구에만 오만 원 쓴 이유

-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한 학자의 삶이 담긴 그림

 

십 년하고도 몇 년이 더 흘렀다. 이십대 후반, 제주도 여행길에서 그림 하나를 샀다. 누가 보아도 아주 조악한 영인본이었다. 추사적거지 앞의 허름한 슈퍼, 먼지가 소복이 쌓인 물건들 한 켠에서 그 그림을 본 나는 망설임 없이 산 것이었다. 단돈 만 원에….

 

며칠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표구점으로 갔다. 나는 액자 중에 값이 조금 있어 보이는 것을 골랐다. 고액의 액자는 아니었어도 대나무로 테를 두른 것이 그림과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표구사에게 그림을 건넸더니 입술 한쪽 가장자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윽고 한마디 했다. “척 봐도 영인본이라 그림은 가격이 없을 듯한데 오만 원짜리 표구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의 말투는 친절했으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해주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라서요.” 조악한 영인본이라는 걸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음에도 표구사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자취방 벽면에 액자를 매단 후 나는 뿌듯해졌다. 그럼에도.... ‘참, 가짜라 어쩔 수 없군.’ 번득거리는 액자와 달리 복사한 그림은 내가 봐도 형편없었다.

 

 ▲  빈한나의 서재

 

가격이 없는 세한도(歲寒圖). 지금 나의 서재 벽면에 아직도 걸려 있다. 장가를 가고 서너 번 이사를 했지만 끝내 이 그림을 버리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삶이 팍팍하다고 여겨질 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은 어느새 쓸쓸한 듯 고요해진다. 백석의 시구처럼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 후 나는 제주도에 갈 때마다 추사적거지를 찾았었다. 그러던 어느 해 대정읍성 일대와 추사적거지는 정비에 들어갔고 가물가물해진 슈퍼에선 세한도 복사본을 더 이상 팔지 않았다.

 

▲ 제주 추사적거지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1844년 그의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이 되던 해에 그린 그림이다. 1840년(55세) 제주도에 유배를 온 추사는 1843년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서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를, 이듬해인 1844년에는 하우경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을 받게 된다. 절해고도의 가시 울타리에 위리안치 된 추사는 방대한 책을 준 이상적의 정성에 감격하고 또 감격하여 그에게 세한도를 그려주고 발문을 적었다.

 

세한도는 논어에 나오는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는 글귀를 화제로 삼았다. 작품이 완성된 지 70년이 지난 1914년에 표구된 세한도는 한 폭의 두루마리 형태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한도는 그림과 발문까지 너비 23cm, 길이 108cm 정도인 일부분에 불과하다. 세한도의 전체 규모는 너비 23cm, 길이 14m에 달한다. 앞부분에는 작품의 제목(완당세한도)과 작품 소장내력이, 이어서 본 작품인 「세한도」와 발문, 그 뒤로 수많은 글들이 이어진다. 세한도를 감상한 사람들이 쓴 감상문인 제찬이다. 세한도를 보고 글을 남긴 당대의 지식인은 모두 17명, 그들은 당시 청나라의 지식인들이었다.

 

김정희의 이상과 혼이 담긴 국보 제180호 「세한도」, 간결하고 소산한 그림도 그림이지만 정중하고도 단정한 글씨로 쓴 발문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 그리고 집 한 채,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그림은 당시 김정희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가시울타리에 둘러싸여 풍토병에 시달리고 음식과 의복도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고단한 귀양살이, 유배생활 3년이던 해(1842년)에 부인 예안 이씨의 사망...그는 부인의 죽음도 모른 채 이씨가 사망한 다음날 부인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세한도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그려진 것이다.

 

쓸쓸한 마음에 거친 붓 하나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종이 위에 먹물조차 메말라 있어 그의 처연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며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했던 추사는 그 제자가 받아온 청나라 학자의 글에 힘입어 혼자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으리라.

 

▲ 서재 벽면에 걸린 세한도 영인본

 

오늘 아침, 나는 이 세한도를 보며 또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것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할지니’ 비록 초췌하고 초라한 나일지라도 비루하지 않고 맑은 정신이 있기에 오늘도 엄정하게 하루를 보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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