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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또 하나의 일상

귀차니즘 혹은 참선하는 산사의 개

 

 

 

 

귀차니즘에 빠졌거나 혹은 참선하는 산사의 개

 

시집 한 권 들고 산사에 갔습니다.

다솔사 승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기둥에 기대어 시를 읽다,

잠시 고개를 들었더니 알록달록 연등 아래 희끄무레한 무엇이 보였습니다.

 

 

뭔가 싶어 다가갔더니 흰 개 한 마리였습니다..

건데 이 놈, 참 무디기도 합니다.

 

 

옆에 가도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찰칵찰칵’ 셔텨를 누르자 그제야 힘겹게 고개를 듭니다.

눈은 그대로 깜은 채로 말입니다.

 

 

" 에잇, 저리 가!"

귀찮은 듯 발을 젓더니 금세 다시 드러눕습니다.

 

 

그러더니 '쿨쿨' 잠으로 빠져들더군요.

 

 

면상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쿨쿨' 입니다.

 

 

"뭐얏!"

여행자의 발소리에 다시 잠을 깬 개가 목을 듭니다.

 

 

"또 너야?"

 

 

성냄도 잠시,

저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깁니다.

 

 

언제 그랬느냐, 는 듯 낮잠 삼매경에 이내 빠져듭니다.

 

 

“그래, 자라 자. 너 팔자가 상팔자다.”

 

 

그만 푹 자라고 말하고, 툇마루로 돌아와 다시 시집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30여 분 흘렀을까요.

아, 이 산사의 개는 그때까지 자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레 다시 다가갔습니다.

참, 이렇게 평온한 모습이라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듭니다.

그것도 눈을 감은 채....

 

 

"제발, 좀 가세요. 예~에?"

이번에는 애원하듯 크게 발을 내저어 가라고 합니다.

 

 

"미안혀. 심심해서."

진심으로 미안해서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산사의 개는 발을 쭉 뻗는가 싶더니 몸을 움츠리기 시작했습니다.

 

 

허허, 이 놈 알고 봤더니

기지개를 펴고 있었던 것이지요.

 

 

'옹알옹알'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발을 가슴팍으로 팍 당겨 곤히 잠듭니다.

 

 

처음엔 이 산사의 개가

그저 게으른 놈인 줄만 알았습니다.

'귀차니즘'에 빠져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산사의 개와 두어 시각을 보냈더니

그의 천성이 느긋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후지와라 신야가 쓴 <티베트방랑>의 '경을 먹는 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이 태평한 산사의 개는 이미 불경을 다 외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티베트의 '경을 먹는 개'도 단지 불경에 묻은 버터 때문이라는 해석을 해

불경을 먹는 개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긴 했습니다만.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이 산사의 개도 몸을 일으킵니다.

 

 

그러곤 산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아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몸을 가다듬고 잠시 참선을 하는 것일까요.

 

 

한참을 그렇게 꿈쩍도 않고 서 있더니, 몸을 돌려 법당으로 달려갑니다.

 

 

"이젠 나 그만 보고 자넨 자네 길을 가시게"

산사의 개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알 듯 말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