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고유의 풍경, 그 아름다움에 반하다
-고성 학동마을 돌담길과 최영덕 씨 고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학동마을에 도착했다. 골목에는 깊은 정적만이 흘렀고 이따금 개가 짖어댔다. 주말이라 행여 자식이 오나 하며 골목을 왔다 갔다 하는 어머니들만 하나둘 보인다. 어스름이 이미 내려 마을에는 푸른빛이 감돌았고 여행자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원래 이곳 학동마을은 1670년 경 입향조인 최형태가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알을 품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겨 날이 밝자 그곳을 찾아 갔다. 덤불이 우거진 황무지이긴 하나 대대로 이어갈 명당임을 믿어 이곳을 학동이라 이름 짓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학동마을의 담장은 사진처럼 돌의 면 높이를 같게 하여 가로줄눈이 일직선이 되도록 쌓은 '바른층쌓기(켜쌓기)'이다
사실 여행자는 전국의 수많은 돌담길을 가보았다. 이곳 돌담길도 작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인데 오늘따라 비가 내렸다. 하는 수 없이 사진 찍는 일은 접어두고 찬찬히 걷기로 했다. 이곳 돌담은 2006년 6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58로 지정되었다.
돌담에는 양반꽃으로 불리는 능소화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 마을의 옛 담장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담장 아랫부분은 배수 등을 위해 돌로만 메쌓기(강담)를 하였고 그 위로는 돌과 흙을 번갈아 찰쌓기(토석담)를 했다.
지붕돌은 기와를 쓰는 대신 넓고 평평한 판석을 썼다
마을 뒤 수태산에서 채취한 2~5cm 두께의 납작돌과 황토를 섞어 ‘바른층쌓기’로 세운 돌담이다. ‘바른층쌓기’는 돌의 면 높이를 같게 하여 가로줄눈이 일직선이 되도록 돌을 쌓는 방법이다. ‘켜쌓기’라고도 한다. 이와 반대로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것을 ‘허튼층쌓기’, 혹은 ‘막쌓기’라고 한다.
아랫부분은 돌로만 쌓은 '강담'이고 위는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석담'이다. 돌로만 쌓는 것을 '메쌓기'라 하고 돌과 흙 등을 섞어 쌓는 것을 '찰쌓기'라고 한다
수태산에서 채취한 납작돌을 나란히 쌓은 담장은 마을의 정취와 잘 어울려 고유의 풍경을 연출한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담장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지붕돌이 기와가 아니라 납작하고 큼직한 판석으로 마감을 한 것도 특징이다.
사랑채는 앞면 7칸, 측면 3칸의 겹집구조이다. 둥근기둥에 활주가 있다.
골목을 따라 한참을 가니 소나무 아래 묵직한 행랑채가 나타났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된 최영덕 씨 고가이다. 이 집은 최영덕 씨의 5대 조부인 최태순이 1869년 4월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랑채를 들어서면 학림헌鶴林軒이라는 현판이 달린 앞면 7칸, 옆면 3칸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학동마을은 조선시대 통영 통제사의 행정관리지역이었으나 관청이 멀어 이곳에서 행정 권한을 위임 받아 행정 출장소인 ‘향소’의 역할을 담당했다.
사랑채에는 매사梅史라고 적힌 현판도 있다. 매사는 최태순의 아호인데, 구한말 전라감사와 탁지부 대신을 지낸 82세의 해사 김성근이 1916년 최승환의 초청으로 이 집을 방문하여 썼다고 한다.
사랑채 축담의 세면기
판석을 주로 쓴 담장과 안채의 축담과는 달리, 사랑채에는 층계와 축담 덮개돌을 화강암으로 갈무리한 것이 눈에 띈다. 반듯하게 자른 화강암은 크기도 대단해서 당시 이 집안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랑채 앞의 정원
축담 돌에 조각하여 만든 돌거북과 세면기가 이채롭다. 돌을 동그랗게 깎아 만든 세면기는 아래로 배수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랑채 한쪽으로는 소담한 정원이 있는데 500년 되었다는 동백나무와 400년 되었다는 모과나무가 마주 보고 있어 오랜 연륜을 짐작하게 한다.
여행자의 바짓가랑이를 문 문제의 개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다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으며 나에게 달려든 것이다. 이럴 때에는 늘 하듯이 여행자도 같이 맹렬하게 멍멍 짖었다. 약간 기세에 눌린 듯하던 개가 다시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다. 참, 이럴 때에는 낭패다. 같이 짖을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인 내가 바짓가랑이 물렸다고 개다리를 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인아주머니에게 혼나고 있는 개, 갱상도 말로 꼬씨다(고소하다). 담장의 수챗구멍에서 나오는 배수로도 수키와로 잘 마감하였다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는데 마침 안주인이 나와 겨우 떼어 놓는다. 주인에게 쫓겨 가던 개가 뒤를 살짝 돌아보더니 메롱 놀리듯 한 번 짖는다. 나도 질 세라 “멍멍” 두 번 짖어 주었다. 이놈의 개는 고택을 구경하던 내내 틈만 나면 나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혹시 좋아하나.
정성이 돋보이는 내외담
사랑채와 안채 사이는 내외담이 있다. 내외담은 얼핏 보아도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학동마을의 담장과 비슷해 보이나 외부 담장의 큰 돌과는 달리 작은 돌로 촘촘히 가로줄을 맞추어 쌓은 정성이 돋보인다. 중간에 기와로 포인트를 주어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벽체의 단조로움을 피했다. 지붕은 판석이 아닌 기와로 마감을 하였다.
곳간채. 사랑마당도 그렇지만 안마당에도 판석을 깔아 진땅을 밟지 않도록 하였다
안채
안채는 앞면 5칸으로 푸른 대숲을 배경으로 판석을 쌓은 축담 위에 자리하고 있다. 축담은 자연석인데 층계는 역시 큼직한 화강석을 다듬어 썼다. 안채 좌우에는 익랑채와 곳간채가 있고 텃밭이 있다. 샛문이 하나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우물이 있다.
안채의 축담은 판석으로 쌓은 반면 층계는 잘 다듬은 큼직한 화강석을 이용했다
안마당에는 진땅을 밟지 않도록 적당한 가격을 두고 판석을 깔았다. 마당 끝 나무 사이로 보이는 굴뚝이 앙증맞다. 사랑채 굴뚝을 안마당으로 낸 것이다.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후 넓은 돌로 지붕을 얹은 것이 마치 탑처럼 보인다.
안마당의 앙증맞은 굴뚝
마당을 거닐며 고택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는데 마침 사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 집에 속한 가묘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담장 너머 높은 곳에 있었다. “ 저기 가묘가 있는 집은 어떻게 되죠?” “아, 큰집입니다. 재금(분가) 나오기 전의 집이지요.” 주인아주머니께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와 냉큼 옆집으로 갔다.
안채 옆의 텃밭과 샛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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