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제주 초가의 모든 것!!
제주 초가의 전형,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1840년 9월, 제주에 당대의 지식인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왔다. 10월 2일 대정에 도착한 김정희는 9년 동안 위리안치 돼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추사체를 완성했고, 제주도민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실시해 제주 학문발전에도 이바지했다.
▲ 위리안치된 추사 제주 유배지의 탱자 울타리
추사는 영조의 사위였던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고 부친은 이조판서였던 김노경으로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러던 그가 헌종 6년(1840)에 안동 김 씨 세력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한 채 제주로 유배 온 처지가 되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추사가 제주 대정에 와서 처음 유배지로 삼은 곳은 군교(軍校) 송계순의 집이었다.
‘정군(鄭君)이 먼저 가서 군교인 송계순의 집을 얻어 여기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은 과연 읍 안에서는 약간 나은 집인데다 꽤나 정갈하게 닦아 놓아다네. 온돌방은 한 칸인데 남쪽으로 향하여 가느다란 툇마루가 있고, 동쪽으로는 작은 정주(鼎廚, 부엌)가 있으며, 작은 정주의 북쪽에는 또 두 칸의 정주가 있고 곳간 한 칸이 있네. 이것이 바깥채이고 또 안채가 이와 같은 것이 있어 주인은 전처럼 안채를 쓰게 하였고 내가 바깥채에 기거하기로 했다네. 다만 이미 바깥채는 절반으로 갈라서 경계를 만들어놓아 손님을 맞이하기 충분하고, 작은 정주를 장차 온돌방으로 개조한다면 손님이나 하인 무리들이 또 거기에 들어가 기거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일은 변통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네.’
추사는 아우 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귀양살이 집을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것으로 말했다. 탱자 울타리에 갇힌 귀양살이의 불편한 신세는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추사는 몇 년 후 강도순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ㄷ' 자 형으로 안채(안거리), 별채(모거리), 바깥채(밖거리)로 되어 있다.
지금의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1948년 4․3항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84년경 문집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추사는 유배가 끝날 무렵 식수의 불편 때문에 안덕계곡이 있는 대정현 창천리로 다시 한 번 더 옮기게 된다.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의미 외에도 이 집은 그 자체로 제주 초가의 전형으로 둘러볼 만하다. 집은 ‘ㄷ’자 형으로 안채인 안거리, 별채인 모거리, 바깥채인 밖거리로 구성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제법 널찍한 마당이 있다.
▲ 어귀담과 정낭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어귀담(사립짝)’을 볼 수 있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대문형식인데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어귀담의 양 옆에 기둥인 정주석이나 정주목을 세우고 나무막대 3개인 정낭을 걸쳐 사용하여 그 집에 사람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정낭이 하나도 걸쳐 있지 않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정낭이 하나만 걸쳐 있으면 집안에 사람이 없으나 곧 돌아온다는 의미이고, 두 개의 정낭이 걸쳐 있으면 저녁때쯤 돌아온다는 표시(금일 중에 돌아온다는 표시)가 된다. 세 개의 정낭이 모두 걸쳐 있으면 집에서 먼 곳으로 출타했다는 표시다. 마당에 곡식을 널어 말릴 때는 사람이 집안에 있어도 정낭을 있는 대로 걸치기도 한다.
▲ 쉐막과 몰방에
정낭이 하나도 걸쳐 있지 않아 안쪽으로 들어섰다. 육지에서 연자방아라 불리는 ‘몰방애’가 눈에 띈다. 그 옆으론 마소를 키우던 외양간인 ‘쉐막’이 자리하고 밖거리 모퉁이를 돌아서면 제법 너른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모거리와 안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안채인 안거리
‘안거리’는 안채를 말하는데, 3칸짜리가 기본이다.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강도순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당시 강도순 소유의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 정지(부엌), 안쪽으로 아궁이가 연결되지 않은 제주만의 특징인 5개의 '솥덕'이라 불리는 화덕이 보인다.
제주 가옥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람이 심해 다른 지역보다 지붕의 물매(경사도)가 완만하고 건물이 지면에 낮게 붙은 구조를 보인다는 데에 있다. 구조를 평면으로 보면 대개 가운데에 대청인 상방을 두고 좌우에 부모의 방인 ‘큰 구들’(안방)과 자녀들 방인 ‘작은 구들’을 둔다. 큰 구들 북쪽에는 물품을 보관하는 ‘고팡’을 두며, 작은 구들 앞에는 부엌인 ‘정지’를 두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 대청인 상방과 물품을 보관하던 고팡, 상방과 고팡에는 판문을 달았다.
‘고팡’은 음식 재료와 살림살이를 보관하는 제주 특유의 창고다. 고팡은 대개 가장이 쓰는 큰 구들 뒤에 두었다. 그래서 밖거리에 있는 자식에게 안거리를 내주는 것을 ‘고팡물림을 한다’고 했다.
제주에서는 부엌을 ‘정지’라 한다. 겨울이 춥지 않은 제주도는 육지의 온돌구조와는 달리 취사와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분리되어 있다. 바닥에 ‘솔덕’이라고 하는 4~5개의 돌로 만든 화덕을 사용했다.
▲ 물팡과 물허벅
안거리(안채) 정지(부엌) 앞에는 ‘물팡’과 ‘물허벅’이 있다. 식수로 쓸 물을 길어올 때 사용했던 옹기를 ‘물허벅’이라 했고 이것을 올려놓는 곳을 ‘물팡’이라 불렀다. 제주도에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바닷가의 샘물이나 고인 빗물인 봉천수(奉天水)를 물허벅에 길어와 식수로 사용했다.
▲ 안거리의 큰 구들(안방)과 벽장 그리고 굴목
▲ 안거리(안채)와 모거리(별채) 전경
‘모거리’는 마당 모서리에 있는 일종의 별채인데, 추사가 기거하던 곳으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등 여러 점의 시화를 남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은 김정희는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다. 그의 추사체는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모거리에 거처했던 그의 서화관이 지고함을 다시 알겠다.
▲ 추사는 모거리인 별채에 기거했다. 초의선사와 추사의 만남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추사는 1843년 봄, 꿈에도 그리던 초의선사를 만나게 된다. 초의선사가 바다를 건너 찾아온 것이다. 한 지붕 아래 6개월을 지내며 초의는 떠나게 되는데, 그때 그들의 만남이 모거리에 재현되어 있다.
▲ 밖거리(바깥채)
바깥채인 ‘밖거리’는 추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추사에게는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제주 유배 시절에도 그는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 눌
마당 귀퉁이에는 ‘눌’이라는 볏짚더미 같은 것이 있다.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 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쌓아 놓은 것을 ‘눌’이라고 한다. ‘눌’을 만드는 것을 ‘눌을 눈다’고 했다.
▲ 돗통시
요즈음 제주의 돼지는 인기 상한가다. 예전 제주는 집집마다 ‘돗통시’가 하나씩 있었다. 돗통시는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사람들이 볼일을 보는 화장실을 합친 공간이다. 돗통시에 돼지를 키워 인분을 처리하고 그곳에서 나온 퇴비를 다시 밭에 뿌려 이용하는 방법은 제주만의 지혜로운 농법이다.
▲ 강한 해풍에 견디기 위해 지붕의 줄 매기를 단단히 했다.
눌 앞에 서면 마당은 가운데로 안거리, 모거리, 밖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촘촘하게 줄 매기를 한 지붕이 유독 눈에 띄는데 제주 지방의 초가는 억새풀의 일종인 ‘새풀’로 주로 지붕을 많이 이었다. 강한 해풍에 견디기 위해 지붕에 가로, 세로로 줄 매기를 육지보다 촘촘히 맨 것이 특징이다.
▲ 풍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구조물이 있는데 ‘풍채’가 그것이다. 제주 지방의 남향집에선 여름철 뜨거운 직사광선을 차단하기 위해 마루 전면에 차양과 비슷한 풍채를 앞 퇴에 붙여 사용했다. 풍채는 햇빛을 차단하는 용도도 있지만 비와 바람이 심하게 집안으로 들이칠 때 풍채를 받치고 있는 막대기를 내려서 비와 바람을 막는 역할도 했다. 그러고 보니 왜 풍채를 튼실한 기둥으로 받치지 않고 가는 막대기로 버티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
이런 풍채와 비슷한 구조물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바닷바람이 심한 남해안 지방에서 보이는데 대청이나 툇마루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이나 전남 해남의 녹우당에 가면 이와 비슷한 차양구조물을 볼 수 있다.
추사는 제주의 이곳 유배지 당호를 귤나무 속에 있는 집이라는 뜻인 ‘귤중옥(橘中屋)’이라 이름 지었다. 얼핏 액호에서 제주의 자연과 서정에 깊이 젖어든 듯하나 유배생활의 허허로움과 스산함 그리고 애잔함도 그 속에 배어 있다.
‘매화․대나무․연꽃․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겉과 속이 다 깨끗하고 빛깔은 푸르고 누런데 우뚝한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므로 나는 이로써 내 집의 액호(額號)를 귤중옥으로 삼는다.’
유배생활이 9년째 접어든 헌종 14년(1848) 겨울 12월 6일, 추사는 마침내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이 소식이 추사에게 전해진 것은 보름쯤 뒤인 12월 19일이었고 추사는 이듬해 1월 7일, 9년간의 유배생활을 정리하고 대정 유배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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