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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김일성별장, 왜 남쪽 화진포에 있지?




김일성 별장, 왜 남쪽 화진포에 있지?

하늘이 무슨 요술을 부리는 듯하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가 싶으면 안개가 몰려와 한 치 앞을 볼 수 없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다가도 하늘은 금세 맑아진다. 바다와 맞붙은 화진포는 잠시나마 그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화진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승만 별장에서 호수를 따라 느릿느릿 걷다 보면 이기붕 별장이 나온다. 이기붕 별장은 솔숲에 싸여 눈여겨봐야 하지만 성곽처럼 견고한 모습을 한 김일성 별장은 멀리서 봐도 금방 눈에 띈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 이기붕 별장이 있다면 김일성 별장은 바다에 바짝 붙은 암벽에 자리하고 있다. 벽돌로 쌓은 성채 같은 이 별장은 그 자태가 사뭇 위압적이다. 이곳에 서면 금구도와 해수욕장, 화진포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조금 가파른 길을 걸어야 한다. 별장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그 청량함은 비길 데가 없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가 숲을 빼곡히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소나무는 줄기가 곧고 붉은 색을 띠어 그 자태가 매우 아름답다. 늘씬한 미인들이 붉은 낯빛으로 여행자를 보고 있는 듯하여 얼굴이 화끈거린다. 얼마를 걷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어 소나무를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솔숲 끝 암벽 위의 별장에 도착했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실제로 이 건물이 김일성의 별장이었을까. 왜 남쪽에 있는 거지. ‘화진포의 성’이라고 불리는 이 별장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래부터 김일성의 별장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로 강제로 옮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건축물이었다.


당시 선교사 중의 한 명이었던 셔우드 홀이 독일 태생의 건축가인 베버에게 설계와 시공을 맡겼고, 베버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암벽 위에 유럽의 성을 닮은 건물을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이 된 후에 이 건물은 북조선 조선노동당 간부들의 하계 휴양지가 되었다.


김일성은 가족들과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1948년부터 한국전쟁까지 화진포의 성은 김일성 가족의 하계 휴양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건물은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별장 입구에는 김정일이 여섯 살이 안 되었을 때 소련군 제25군 정치사령관 리베데 소장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지금의 건물은 원래 건물이 아니고 1964년 철거되었는데, 육군에서 장병들의 하계 휴양지로 새 건물을 지었다가 지난 1999년에 역사안보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건물은 2층의 원통형 건물이다. 건물 내에는 김일성과 한국전쟁에 관한 사진과 자료를 전시해 두었고 2층에는 침실이 재현되어 있다. 틀에 박힌 전시물이 대부분이고 당시의 별장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거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옥상에서는 화진포 해수욕장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하나 오늘은 안개가 심해 파도마저 희미하다.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의 땅이었던 이곳이 전쟁 후 남한의 땅이 되면서 별장들의 주인도 바뀌게 된다. 화진포는 어찌 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공간이다. 일제시대, 한국전쟁, 독재 등의 잔영이 이곳 호수와 바다에 여전이 남아 있다. <가을동화>의 촬영지여서 그런지 젊은 연인들이 유독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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