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한 바퀴 돌면 절로 한옥 공부가 되는 괴시마을
-경북 영덕군 괴시마을
마을 자체가 문화재
마을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괴시리.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주위에 늪이 많고 북쪽에 호수가 있어 호지촌으로 불리다가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과 중국의 괴시마을과 비슷해 괴시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진다.
앞으로는 너른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을 등진 괴시마을은 멀리서 봐도 기와집이 즐비하다. 전통 건축물이 잘 보존된 이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만 해도 10채가 훌쩍 넘는다.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을 비롯하여 대남댁, 물소와 고택, 해촌 고택, 천전댁, 주곡댁, 물소와 서당, 경주댁, 구계댁, 사곡댁 등 여러 지정 문화재와 옛 가옥 30여 호가 밀집되어 있다.
물소와 고택 골목길
절로 한옥 공부가 되는 전통마을
마을은 전형적인 흙담이 집과 집, 집과 골목길의 경계가 되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 마을 당산나무를 둘러보고 골목길을 따라가면 길 좌우로 늘어선 옛집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집들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개성이 있어 한옥을 이해하는데 좋은 공부가 된다.
날개 달린 천전댁, 사곡댁의 지붕 박공, 구계댁의 굴뚝, 물소와 고택의 내외담, 홑집과 겹집, 각기 다른 툇마루와 쪽마루 등 한옥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사곡댁(경북 문화재자료 제425호)
사곡댁은 정면 4칸, 측면 5칸의 ㅁ자형 건물이다. 특이한 점은 사랑방에 쪽마루를 달고 전면 지붕이 박공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박공이란 지붕이 八자 모양으로 맞물려 있는 건물에서 지붕 아래쪽의 삼각형을 이루는 부분에 붙인 두꺼운 널을 말하는데, 이 집은 박공이 전면을 향해 노출되어 있다. 사곡댁은 1890년에 남용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택호는 현 소유자의 고조부인 남조영의 처가 마을 이름인 사곡을 딴 것이라 한다.
사곡댁 쪽마루
툇마루와 쪽마루는 엄연히 달라
흔히 툇마루와 쪽마루를 혼용해서 쓰곤 한다. 문화재를 다루는 이들도 그런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툇마루와 쪽마루는 엄연히 다르다. 괴시마을을 돌다보면 이 두 마루의 차이점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툇마루는 고주와 외진주 사이의 툇간에 만들어지는 마루이고, 쪽마루는 외진주 밖으로 덧달아낸 마루이다. 쉽게 말하면 툇마루는 안쪽 기둥과 바깥쪽 기둥 사이에 있는 마루이고, 쪽마루는 안쪽에는 기둥이 있지만 바깥쪽은 기둥이 없는 마루로 따로 짧은 동바리 기둥으로 마루를 받친다. 툇마루는 대개 우물마루이고 툇마루보다 폭이 좁은 쪽마루는 때로 장마루를 깔기도 한다. 툇마루가 주로 앞에 있어 방과 대청, 바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면 쪽마루는 건물의 옆면이나 뒷면의 보조출입문 쪽에 달아 드나드는데 편리하게 한다.
구계댁(경북 문화재자료 제396호) 툇마루와 굴뚝
위 사진의 구계댁 툇마루를 보면 사곡댁 쪽마루와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남향인 구계댁의 사랑채는 정면 3칸인데, 사랑마루는 1칸이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툇간을 두었는데 전면 마루는 툇간보다 다소 돌출되어 있다.
구계댁 안채의 굴뚝
구계댁 사랑채와 안채 뜰에 각기 굴뚝이 있다. 굴뚝은 대개 집 뒤에 있는 게 일반적인데 비해 안채에는 중정에 굴뚝이 있고 사랑채에는 마루 바로 앞에 있다. 사랑마루 아래로 긴 고래를 내어 굴뚝을 만든 점이 특이하다.
대문채가 있는 집이 의외로 드물어
괴시 마을을 돌다 보면 대문이 없는 집들이 허다하다. 대개 ㅁ자형의 집인데 별도의 대문채가 없이 사랑채 옆의 문을 통해 안채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중 대문채를 가진 집은 천전댁과 경주댁을 들 수 있다. 경주댁의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비교적 소담한 형태이다.
경주댁(경북 문화재자료 제395호)의 대문채
비록 최근에 수리되고 만들어진 흔적이 역력하나 옛 대문을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옛집의 대문은 크게 일반서민들이 사용하던 사립문과 사립문 중에서도 대나무 등으로 잘 짠 대문인 바자문, 양반가의 솟을대문과 평대문을 들 수 있다. 해촌 고택의 대사립문은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비교적 잘 어울린다.
마을에서 가장 큰 괴시파 종택
영양 남씨 괴시파 종택은 그 규모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정면 8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사당이 있다. 사랑채 부분은 오른쪽으로 3칸이 돌출되어 있어 한쪽날개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괴시파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5호)
방 앞으로는 반 칸 크기의 쪽마루를 놓았다. 괴시파 종택은 17세기 말에 남붕익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수차례에 걸쳐 보수를 하여 다소의 변형은 있으나 조선 후기 가옥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중요한 가옥으로 인식되고 있다.
괴시파 종택
괴시파 종택 옆에는 물소와 서당이 있다. 물소와 남택만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이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약 150년 전에 건립하였다.
물소와 서당(경북 문화재자료 제394호)
물소와 고택 안채
마당을 가로지른 독특한 내외담
서당에서 나오면 바로 물소와 고택이 있다. 조선시대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이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4년에 중수하였다.
물소와 고택(경북 문화재자료 제198호) 사랑채의 툇마루
이 집에서 특이한 점은 중문간 앞쪽과 담벽에서 중문간 쪽으로 6m 가량 쌓은 내외담이다. 대개 내외담이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중문간에 가로로 놓이는 것에 비해 이곳은 사랑채 옆으로 내외담이 둘러쳐져 있다.
물소와 고택의 내외담
이는 골목에서 바깥마당으로 출입할 때 사랑채의 전면이 여성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사랑마당 오른쪽 구석에 있는 우물에서 여성이 집안일을 할 때 노출되는 것을 고려하여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간 앞쪽과 바깥 담벽 방향으로 담을 쌓았다.
물소와 고택의 봉창
원형 그대로의 봉창
물소와 고택은 괴시리의 다른 고택과 마찬가지로 안채를 볼 수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고택은 집이 꼭꼭 잠겨 있어서 아쉬움이 컸다. 아쉬운 마음에 그나마 개방된 집 바깥쪽을 살피다 봉창을 발견했다. 아주 원형 그대로의 봉창이었다. 환기나 일조를 위해 살림집에서 내는 봉창은 창호지를 바르지 않고 벽을 뚫고 살대를 대략 엮어 놓는 형태이다. 대개 크기가 작고 벽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문틀 같은 울거미는 없다.
괴시리 한옥 여행은 영은 고택(경북 문화재자료 제459호)에서 끝이 났다. 골목길을 벗어나 들판으로 난 길을 걸으며 마을을 뒤돌아보았다. 몇 번이고 봐도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을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문이 꼭 잠겨 있다는 것이다. 집은 사람의 체취를 먹고 산다. 나무가 주재료인 우리 옛집은 더욱 그렇다. 관리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좀 더 많은 이들이 한옥을 접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한 시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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