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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풍경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풍경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일원

영덕으로 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골이 점점 깊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적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간간히 보이는 민가들만이 이 깊은 골짜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달렸는데 왠지 모를 기운이 느껴진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입암’이라고 적힌 마을 표지판이 선명하다. 입암이라. 우리말로 하면 선바위다. 고개를 돌리니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마을 풍경이 들어왔다.

일단 차에서 내렸다. 제법 널찍한 주차장 맞은편으로는 공원이 있었다. 먼저 버릇처럼 마을의 생김새를 가늠해보았다. 마을 앞으로는 맑은 가사천이 흐르고, 언덕에는 입암서원이 있었다. 푸른 계곡에 우뚝 솟은 바위의 생김새는 말 그대로 선바위, 입암이었다. 선바위 벼랑에 날아갈 듯 매달린 일제당이 날렵했고 만활당은 마을 깊이 포근하게 안겨져 있었다.

입암서원

굳게 닫힌 서원 문을 열고

서원으로 향했다. 장정 몇이서 손을 잇대어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장대한 소나무들에 둘러싸인 서원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무슨 이유일까. 이리 보고 저리 살펴도 들어갈 길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옆 민가로 갔다. 할아버지 한 분이 손을 씻고 있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묻는데 돌아오는 답이 퉁명하다. 그래도 서원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기뻤다. 가만 집을 살펴보니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였다.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건물을 돌아가니 서원으로 통하는 문이 나왔다.

서원은 의외로 단출했다. 건물이라고는 강당과 사당이 전부였다. 서원에서 얼마간 가면 부속건물인 일제당과 만활당이 있다. 입암서원은 효종 8년인 1657년에 건립되었다. 여헌 장현광,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 정사진 등을 배향하고 있다. 여헌 장현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로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입암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1907년에 사당이 소실되었다. 서원은 1913년에 강당이 복원되고, 1972년에는 사당 역시 새로 만들어졌다. 강당은 팔작지붕 형태인데 처마가 곧게 내려뻗지 못한 모양이 다소 흥미롭다. 강당 앞뜰에는 장현광 선생이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었다.


노계시비

풍광에 취해 빼어난 가사<입암별곡>을 짓다

서원을 나와 건너편 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노계 박인로 선생의 시비가 있다. 2001년에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노계 선생은 1561년 영천시 북안면 도천에서 태어나 1642년까지 여든 두 해를 살았다.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문학의 한 지주로 높이 평가받는 그의 비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박인로 선생은 이곳에 머물던 여헌 장현광 선생과의 교분이 각별하였다고 한다. 69세의 선생을 찾아 죽장에 왔다가 입암의 풍광에 취하여 지은 것이 입암 29곡인데 노계문학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8차례나 죽장을 방문하여 입암을 배경으로 가사<입암별곡>과 시조<입암29곡>을 지었다.

가사천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 이름도 가사천이다. 4월 마지막 날인데도 벼랑에는 꽃들이 피어 있다. 산중의 마을이다 보니 이곳은 아직 봄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의 처소였던 만활당은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있었다. 평생 은둔자의 삶을 자처한 선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 소담하다.

만활당

토벽집

빈집도 더러 보이는 산골의 마을길에는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일제당으로 가다 어느 집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흙집을 본 것이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벽집이지만 요즈음은 외진 곳이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주인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집 구경을 했다. “아이고, 뭐 한다고 그리 찍소. 집이 형편없건만.”

일제당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네

일제당으로 가는 길에 한 할머니를 만났다. 잠시 인사만 하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 할머니의 집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일제당은 선조 33년인 1600년에 건립되었다. 정자는 가사천을 앞으로 두고 기암절벽을 등지고 서 있는데, 그 기암이 바로 ‘입암’, ‘선바위’다. 그 자리한 위치가 탁월하여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일제당은 1907년 의병이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맞아 싸운 입암전투 때 소실되었다가 1914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일제당은 절벽에 의지하여 높은 자연석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앉힌 모양새다. 앞에서 보면 그 날아갈 듯한 자태에 흠칫 놀라게 되는데 마을에서 돌아 뒤로 가면 그 편안함에 다시 놀라게 된다. 우람한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난 오솔길이 짧지만 아주 강렬하다.

정자에 오르니 맑은 가사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2백년은 족히 되었을 느티나무들이 계곡을 따라 늘어서 있다.


산골마을, 봉당 위의 대화

마을로 돌아오는데 고즈넉한 돌담과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슬레이트 지붕이었으나 원래의 집 형태는 초가를 인 흙집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집을 보려고 다가서니 옆집에서 아까 선바위에서 보았던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봉당과 할머니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네었더니 아는 체를 하신다. 정미식 할머니(74)였다. 정씨 할머니는 이웃 할머니 집에 놀러와 봉당에 앉아 있었다. 흙바닥 그대로인 봉당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풍경이다. 그 사라지는 풍경에 마치 흑백사진 주인공처럼 할머니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마을 이야기와 선바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할머니들은 옛 추억에 젖어들었다. “내가 고향이 영천 선원마을인데, 고향에서는 대성
大姓이라 친척이 제법 많았었지. 머슴들을 많이 두고 농사를 지을 만큼 부유했었지요. 시집 올 때는 택시를 대절해서 이곳까지 타고 왔는데 길이 참말로 나빴지요.” 할머니는 연일 정씨로 부유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친정이 참 잘 살았는데, 이곳으로 시집 온 데는 부모들 때문이지. 남편이 안동 권씨인데 우리 연일 정씨보다 안동 권씨가 더 양반이라며 부모님들이 이리로 시집보냈지요.” 하며 할머니는 농담 반 진담 반의 표정으로 웃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정씨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이 좋다는 말에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하면서 앞장을 서신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에서 제법 널찍한 터에 자리하고 있었다. 돌담에 둘러싸인 집에는 봄이면 노란 꽃을 피우는 산수유나무가 있었다. 아직도 건재한 안채와 비록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사랑채도 있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도 별도로 있으니 예전에는 제법 행세깨나 했었을 집이었다. 건너편 언덕에 큰 기와집이 있어 관계를 물으니 큰집이라고 했다.


안채의 봉당과 흙벽에는 시멘트를 덧대어 다소 삭막해졌지만 건넌방의 벽은 붉은 황토를 발랐다. 이유를 물어보니 할머니의 전용 찜질방이란다. 불을 때면 뜨끈뜨근한 게 그만이라고....


할머니의 시선이 갑자기 봉당으로 향했다. 커다란 대야에 쑥이 가득하였다. “얄궂어라. 누가 갖다 놓았을꼬. 뒷집은 금방 갔다 왔으니 아니고, 앞집은 쑥을 캘 수 없으니 아니고. 참말로 모르겠네.” 그러더니 다시 밭으로 나가신다.

밭으로 가는 할머니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신다. “누가 갖다 놓았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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