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집 기행

해질녘 부여 궁남지를 산책하다




해질녘 부여 궁남지를 산책하다

궁남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이미 기운 뒤였다.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는 건 마음뿐 걷는 것은 느릿했다. 사실 궁남지는 부여에 오면 늘 들르는 곳이다. 부여에 올 때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꼭 봐야할 성지처럼 여기기 때문에 덩달아 곁에 있는 궁남지도 들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못에 드리워진 낭창낭창한 버들가지는 여행자를 유혹하기에 늘 부족함이 없다.


예전에 비해 궁남지 일대는 약간의 변화가 느껴졌다. 연못을 둘러싼 드넓은 연밭이 왠지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부여에 다녀간 지도 수년이나 흘렀다. 얼마 전이라고 여겼는데 이곳에 대한 기억은 이미 저 멀리 가 있었다.


연밭 사이로 난 길로 사람들이 산책을 한다. 해는 이미 떨어지고 있었으나 누구하나 서두르는 이 없다.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더위가 가시는 것이니 어두워진다고 해서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연꽃에 대한 어떤 오해

연꽃을 보니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연꽃하면 흔히 불교라는 특정 종교만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다. 문민정부시절에 경회루와 향원정 못에 있는 연꽃을 다 걷어낸 적이 있었다.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 궁궐에 있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지가 낳은 어이없는 일이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옛 선비들이 늘 가까이 두고 있었던 꽃이기도 하다. 흔히 연지
蓮池, 연당蓮塘, 연못으로 불리는 못들은 연과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는 못에 연꽃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옛 선비들은 이상적인 군자의 모습을 연꽃에서 보았고 정원의 연못에 연꽃을 즐겨 심었던 것이다.


화려한 연꽃으로 둘러싸인 궁남지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궁남지라 한 이유

궁남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보인다. “3월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이고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가운데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겼다.”고 되어 있다.

이때가 백제 무왕 35년(634) 3월이다. ‘궁 남쪽에 못을 팠다’라는 것에서 궁남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로 보아 궁남지는 백제 무왕 때 만들어졌으며 주위에서 발굴된 우물과 주춧돌 등의 유적으로 백제의 별궁 연못으로 보고 있다. 궁남지 옆에 있는 화지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는데, 그곳을 별궁 터로 추측하고 있다.

‘방장선산’은 흔히 삼신산으로 불리는 봉래, 영주, 방장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 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3개의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궁남지에 섬을 만들어 방장산에 비겼다고 하니 이 또한 신선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에는 이외에도 무왕 37년(636) "8월에 망해루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과 무왕 39년(638) "봄 3월에 왕이 궁녀들과 함께 큰 연못(大池)에서 배를 띄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궁남지에서 뱃놀이를 즐겼으며, 뱃놀이를 즐길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당히 컸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궁남지라는 이름이 아니었고 다만 큰 연못(大池)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궁남지와 안압지

일설에는 이 궁남지가 신라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만들어져 안압지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안압지를 가본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안압지와 궁남지는 그 생김새부터 너무나 다르다. 물론 궁남지의 원래 모습이 어떤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둥글게만 조성된 궁남지를 보며 들쑥날쑥한 동선과 직선과 곡선이 지극히 조화로운 안압지를 연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궁남지에 마동설화를 새겨 놓은 비가 있다. 궁남지가 마동인 무왕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다. 무왕의 어머니가 이 연못에 살던 용과 교통하여 무왕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삼국사기>의 ‘무왕이 궁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과 배치된다. 무왕 자신이 연못을 팠으니 맞지 않는 이야기로 전북 익산의 마룡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왕과 관련된 장소에 신성이 부여되어 전해지는 전설로 볼 수 있겠다.



궁남지의 분수

해를 삼켜 온몸이 붉어진 분수의 물줄기가 세차다. 해질녘 하늘로 솟구치는 분수가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한복을 입고 예쁜 부츠를 신은 기분이다.

우리의 옛 정원에는 원래 분수가 없었다. 잘 모르는 이들은 그런 것을 두고 기술의 부족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의 순리를 중요시한 선현들의 가치관 때문이었다. 물을 하늘로 솟구치게 하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 굳이 물의 흐름을 감상하고 싶으면 옛사람들은 폭포를 만들었다. 백제의 옛 궁궐 연못에 분수가 있다는 건 인위적인 정원을 연출하지 않은 우리네 전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궁남지를 소개하는 거의 모든 자료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 조경문화의 원류가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뿌리 없는 분수를 보며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건 여행자의 괜한 자존심일까.


김천령의 여행이야기에 공감하시면 구독+해 주세요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김천령의 풍경이 있는 한국기행]에 링크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