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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해가 가장 늦게 지는 섬, 가거도를 걷다



해가 가장 늦게 지는 섬, 가거도를 걷다
- 머나먼 뱃길, 국토의 최서남단 가거도여행 ②

가거항에 내리니 부두가 시끌벅적했다. 조용한 외딴 섬 항구가 이렇게 붐비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루에 한 번 섬에 들어온 승객들을 실어 나르려는 민박집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대개 미리 민박집을 예약해서 가거도를 찾는다고 했다. 여행자는 늘 그렇지만 섬 여행에 예약은 없다. 그저 우연히, 여행은 늘 의외성이라고 생각한다.

가거도 출장소 앞 최서남단 표지석

 곳곳에는 어부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간혹 동남아인들도 보인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요즈음 가거도에는 열기(불볼락)가 많이 잡힌다. 섬에서 나오는 날 열기로 만선이 된 어선을 여행자는 보게 되었다. 가거도 안내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도가 필요했다. 카메라로 안내문에 부착된 섬 지도를 한 컷 찍었다. 혹시 모를 일. 손에 지닐 수 있는 지도가 없다면 카메라로 찍은 지도라도 봐야 한다. 지도 한 장이면 조선 팔도 어디를 가도 자신감이 생긴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습관처럼 지도를 먼저 챙긴다.

안내문 지도를 보며 대충 섬 지형을 가늠하고 매표소로 향했다. 이곳에도 역시 손에 지닐 수 있는 지도는 없었다.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서도, 가거도에서도 지도는 구할 수 없었다. 어디 가면 지도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출장소로 가라고 했다. 토요일 오후라서 문이 닫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출장소라. 무턱대고 대리마을을 걸었다. 마을의 끝에 출장소가 있었다.

‘대한민국최서남단’ 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었다. 여긴가 보다. 최서남단, 이제야 실감이 난다. 그 머나먼 뱃길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단지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표지석 옆에는 작은 추모비가 있다. 4월 혁명 당시 학생으로 참여해 순국한 김부연 씨의 추모비다.

출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애써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인기척을 확인한 후 사무실로 들어갔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행히 입구에 가거도 지도가 비치되어 있었다. 지도를 손에 잡는 순간,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든다.

고갯길에서 본 1구 대리마을

이제 민박집을 정해야 했다. 배낭과 시커먼 삼각대,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메고 흘깃흘깃 간판을 보니 사람들이 쳐다본다. 마침 한 아주머니 같은 할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민박집 이름이 재밌다. 간판에는 ‘까꿍이네 식당 여관’이라고 적혀 있다.
“민박 됩니까?”

“아니라요. 우리도 손님인데.”

하며 손사래를 친다. 괜히 민망해진다.

 

“여기 손님이 왔는 디 받을랑가?”

식당 안을 보며 아주머니 같은 할머니가 소리친다.

 

“몇 명 인디?”

“한 명 인디.”

“지금 한 명이고 두 명이고 따질 때인감. 감사히 받아야제.”

아주머니 같은 할머니가 딸 같은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순간의 민망함이 사라졌다. “우리 딸이라요.” 여행자가 의아한 눈빛으로 보자 지레 채고 말했다.


넉넉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했다. 처음에는 퉁명한 듯했으나 이내 속정이 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혼자라고 하니 숙박비도 깎아 준다. 아주머니가 미역이며, 열기 구이며. 달래국 등으로 차린 점심을 후다닥 먹었다. 구릿빛 아저씨가 식당에 들어왔다.

 

그의 관심은 카메라. 여행자의 카메라를 요리조리 살피더니 이내 말을 걸었다. 지도를 보며 가거도에 대해 물었다. 소요시간하며 움직이는 동선, 내일 일정까지 염두에 두고 세세하게 물어도 그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종종 가거도 바다 밑을 스쿠버다이빙하고 가거도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는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아주 고급스런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핀잔을 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 부부는 워낙 성실하여 건물을 하나 더 지을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아주머니 같은 할머니가 은근 딸과 사위자랑을 했다.


삼각대와 카메라를 챙기고 항리로 출발했다. 가거도에는 항구가 있는 1구 대리마을과 섬등반도의 비경으로 각종 촬영지로 유명한 2구 항리마을, 그리고 3구인 대풍마을이 있다. 여행자는 일단 항리로 가기로 했다. 교통편은 별도로 없어 그냥 걷기로 했다. 지도로 가늠해보니 6km정도였다. 문제는 항리에서 등대까지도 5km 정도, 숙소로 다시 돌아온다면 왕복 20km 이상을 걸어야만 했다. 걷는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시간이 신경 쓰였다. 벌써 1시 40분이었다.


배도 부르겠다. 슬슬 마을을 벗어나 고갯길을 올랐다. 처음부터 난코스다. 대리마을에서 샛개재까지는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이다. 정말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정도로 길은 비탈졌고 날씨마저 습해 금방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안개는 좀처럼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 왔다 갔다 하는 길을 올라섰을 때에는 이미 녹초였다. 1.35km 정도의 비탈길인데도 시멘트길이 주는 피로감은 훨씬 심했다. 가히 살 만한 섬 가거도인데, 몸은 가히 죽을 맛이었다.


샛개재에서 길은 갈라졌다. 방공호로 가는 길, 독실산․대풍리 가는 길, 항리로 가는 세 갈래 길로 나뉘었다. 여기서부터 항리 가는 길은 평탄했다. 안개를 뚫고 간간이 바람이 분다. 땀에 젖은 몸이 그제야 숨을 쉰다. 안개를 뚫고 오는 건 바람만은 아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파도가 친다. 앞은 온통 하얀데 소리는 한층 또렷해졌다. 혼자 걷는 길에 이젠 친구가 생겼다. 그 많던 나무마저 안개에 묻히고 오로지 앞만 볼 수밖에 없는 길. 그 길에서 여행자는 친구를 만났다.


파도소리를 벗 삼아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포터 한 대가 쌩하며 달려오더니 금방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파도 소리와 나 그렇게 둘이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를 열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부였다. 등대 가는 길이 맞느냐고 물었다. 지도를 보며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가야 한다고 하자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평평했던 길이 갑자기 바다로 내리 꽂힌다. 몸이 앞으로 쏠릴 정도로 경사가 심했다. 지그재그 갈 之자로 경사를 줄이려는 길의 노력은 무의미했다. 한참이나 타박타박 내려가서야 섬등반도에 이르렀다. 가거도에서 가장 유명한 섬등반도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비경이다. 그러나 역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노란 유채와 돌담에 둘러싸여 바람을 피하는 무덤 몇 기만 듬성듬성 보일 뿐이었다.


섬등반도에서 항리마을 민박집까지 내려갔다. <극락도 살인사건>과 <1박2일> 촬영지로 알려진 이 민박집은 바다 끝에 매달려 있다. 민박집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최서남단 해가 가장 늦게 지는 집. 중국 상해까지 43.5km’


벼랑 끝 외딴 집

고개를 드니 독실산 쪽은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섬에 들어와 처음으로 햇빛을 보았다. 이왕이면 등대까지 갈 요량이었다. 마침 해경이 있어 등대 가는 길을 물었다. 여행자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네요. 초행이라 길 찾기는 조금 힘드실 텐데.” 체력은 좋아 보이는데 초행이니 산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그의 말을 새겨 들어야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여행자는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등대로 가는 해안 언덕 산길을 올랐다. 벼랑 끝에 아슬하게 매달린 폐가가 보인다. 저 가파른 절벽에 무슨 심정으로 집을 지었을까.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불현듯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벼랑 끝 폐가에서 독실산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제법 큰 마을이 있었다. 이곳이 항리의 중심마을이다. 돌담에 깊숙이 쌓인 집들은 더러 폐가도 있고 말쑥하게 수리한 집들도 더러 보인다.


마을이 끝나고 산길을 올랐는데도 등대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잘 못 왔나 싶어 샛길로 접어들었다. 대숲을 들어서자 놀랍게도 할머니 한 분이 밭을 매고 있었다. 한 세 평 남짓 될까. 대숲에 둘러싸인 할머니의 밭은 새둥지처럼 포근했다. 마을로 다시 돌아가서 갈림길을 찾으라고 했다. 염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개가 걷히고 염소 떼가 거친 절벽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등대 가는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등대 가는 길에서 본 항리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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