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풍경이란 이걸 두고 말한다
- 머나먼 뱃길, 국토의 최서남단 가거도여행 ⑤
가거도의 아침이 밝았다. 눈을 떠보니 아침 여섯시였다. 창문을 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경우는 여행자에게 흔치 않은 일이다.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일찍 일어난 것도 아니다. 단지 포구의 부산한 아침이 잠을 달아나게 했을 뿐이었다.
민박집 앞이 바로 바다여서 부두로 향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벌써 일어났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포구를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닌 세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동개(똥개)
그들은 한 가족이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이었다. 전날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가거도 여행에 대해 말을 나누었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떠났었다. 딸의 휴가기간을 맞추어 가족여행을 왔다고 노부부는 말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그들은 홍도와 흑산도를 거쳐 가거도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가족 단위로는 좀처럼 오지 않는 여행지들이여서 의아했지만 그 의문은 금세 풀렸다. 노부부는 섬을 비롯해 여행을 오랫동안 다닌 경력자들이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 겁니까?” “글쎄요.” 사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식당 밖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다. 여주인은 오늘도 안개가 쉽게 걷히지 않을 거라 했다. ‘오전에 잠시 걷힐 수는 있겠지만’이라고 덧붙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의 말은 거의 적중했다. 오랜 섬 생활에서의 노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개해수욕장 전경
섬등반도의 온전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섬등반도가 있는 항리는 안개가 걷힐 가능성이 있느냐고 묻자 돌아오는 답은 암울했다. 이곳보다 훨씬 안개가 심할 거라고. 항리는 연중 시야가 좋을 때가 드물다고 부연 설명했다.
회룡산
동개로 향했다. 섬등반도가 있는 항리마을이나 3구 대풍리까지 갈 여유가 없었다.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가거도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능선조망대로 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얼추 5km 정도 되어보였다.
가거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인 동개해수욕장은 굴섬과 동개 사이에 있다. 여전히 안개는 길을 막고 있었고 파도소리만이 바닷길임을 말해 주었다. 거대한 방파제를 넘어서니 해수욕장이다.
회룡산 선녀봉과 가거항
동개해수욕장은 몽돌 밭이었다. 몽돌만한 검은 자갈들이 파도에 밀려 한꺼번에 소리를 낸다. 그 어떤 기도 흉내 낼 수 없는 몽돌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가만히 거닐었다. 비록 안개에 섬은 갇혀버렸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몽롱한 아름다움은 또 다른 서정이었다. 시원스레 풍경을 보지 못하는 답답함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내면의 풍경이 더 좋았다.
해수욕장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난 언덕길을 올랐다. 벼랑에 올라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났다. 민박집에 같이 머물렀던 가족이었다. 쉬엄쉬엄 천천히 걷다가 산중턱에서 그들과 만났다. 반가운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이제 혼자 쓸쓸히 안개를 헤칠 필요가 없었다.
샛개재 가는 길
벼랑 끝에 하늘로 바로 솟은 계단이 아찔했다. 이름 하여 ‘스릴계단’이다. 언덕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과 산으로 가는 길,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물둥개절벽
전망대로 향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누구라고 먼저 할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해무가 걷히면서 가거항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 것이었다. 어제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 여행자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었다. 그 혼란스러움은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등대까지 확연히 보이는 걸 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땅재 전망대에서 잠시 쉬었다. 여행자는 이제 자연스럽게 그들과 일행이 되어 버렸다.
구름이 점점 사라지더니 마침내 가거항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불구불 올라가는 샛개재 가는 길과 우뚝 솟은 회룡산, 가거항의 절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녹섬이 구름을 뚫고 그 자태를 드러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다. 초원으로 되어 있던 아래와 달리 짙은 상록수림 사이로 겨우 사람 하나 다닐 만한 오솔길이 보였다. 예전에 독사가 많았다는 민박집 주인의 말이 내내 신경 쓰였지만 오늘은 혼자가 아니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앞서가던 아주머니가 취나물이며 각종 나물들을 발견하곤 흡족해 한다.
잠시 호젓한 숲길이 이어지더니 이내 갈림길이다. 일행은 비탈진 능선전망대를 버리고 물둥개 절벽으로 향했다. 여행자도 그냥 뒤를 묵묵히 따랐다. 완전한 일행처럼.
잠시 후 다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날씨가 돌변했다. 절벽에 이르러서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는데 어느새 막다른 길이다. 혹시나 안개에 가려 길이 보이지 않나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바로 앞이 절벽이다. 이 절벽의 이름은 ‘물둥개’였다. 좌우로 ‘달뜰목’과 ‘해뜰목’이 있는 걸 보니 동남쪽에 우뚝 솟은 바위벼랑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은 바람마저 거세게 불었다. 그래서인지 바람에 강한 몇몇 나무만 있고 온통 초원이다. 조심조심 안개에 묻힌 물둥개의 풍경을 감상하다 발길을 돌렸다. 동행했던 가족여행객들은 마을로 내려갈 거라고 했다. 혼자라도 능선을 오를까 했는데 시계를 보니 빠듯했다. 그래서 쭈빗쭈빗 그들 뒤를 따랐다.
가거항에 머물던 해무는 이제 방파제 바깥까지 물러갔다. 해가 완전히 하늘과 바다를 장악하였다. 섬등반도도 제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마을로 부리나케 돌아왔다. 주인사내에게 물었더니 섬등반도는 이곳과는 달리 짙은 해무에 싸여 있다고 했다.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동개
이제 섬등반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만재도 가는 뱃길이 염려되었다. 오늘은 만재도에 배가 갈 수 있겠으나 내일 나올 수는 없을 거라고 했다. 적어도 3일 이상이 지난 후에야 만재도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매표소 여직원도 같은 말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목포로 돌아가는 배표를 끊고 대리마을을 쏘다녔다. 항구는 여전히 안개천지였다.
녹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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