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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원시의 섬 가거도, 산속에서 길을 잃다




원시의 섬, 등대를 찾다 산속에서 길을 잃다
- 머나먼 뱃길, 국토의 최서남단 가거도여행 ③

다행히 안개는 걷혔다. 아니 걷힌 것이 아니라 안개가 산을 오르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다. 독실산은 해발 639m로 신안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바다에서 바로 시작하였으니 에누리 없는 높이다.

항리마을

항리마을 돌담길 사이로 난 소롯길로 접어드니 등대 가는 길이 보였다. 한가로이 풀을 뜯던 염소 떼가 여행자를 보자 이리 우르르 저리 우르르 몰려다닌다. 바위벼랑을 아무 거리낌 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저 벼랑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다니. 행여 떨어질까 여행자가 더 가슴 조린다.

벼랑과 초원. 미묘한 긴장감을 준다. 벼랑 틈틈이 보이는 작은 평지에는 축대를 쌓고 돌담을 두른 옛 밭 터의 흔적이 보인다. 한 톨의 곡식이라도 키우려 벼랑 틈틈이 모진 피땀을 쏟은 섬 생활에 가슴이 짠해진다.


가파른 바윗길을 오르고 나니 이내 길은 평탄하다. 봄의 푸름이 산길을 가득 채운다. 제비꽃이며 찔레꽃으로, 길은 봄꽃으로 단장했다. 걷는 것이 절로 즐겁다. 안개가 걷히자 햇살이 얼굴을 강하게 내리쬐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짙은 상록수림이 햇살을 멈추게 한다. 후박나무가 길 양 옆으로 도열해 있다. 이 짙은 군락지는 신선봉까지 쭉 이어졌다 이따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후박나무는 가거도에서 가장 흔한 나무에 속한다.

울릉도와 남부지방 해안가 산기슭에서 주로 자라는 후박나무는 그 껍질이 약재로 쓰인다. 말린 후박피를 끓여 먹으면 천식 같은 호흡기 질환이나 소화불량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후박피는 위를 튼튼하게 하고 강장에도 특효가 있는 한약재로 쓰인다. 가거도의 후박피 생산은 전국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 껍질은 줄기에 수액이 가득 차오르는 6~8월에 벗긴다.

후박나무 군락지

상록수림 사이로 붉은 동백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5월의 동백이라. 아니 춘백으로 불러야 마땅하리라. 날씨는 하夏를 방불케 했지만. 동백 그늘 아래 잠시 다리를 쉬었다. 거친 숨이 귀까지 올랐다. 물 한 모금 마시니 갈증이 가신다. 아! 물이 이제 두 모금밖에 남지 않았다. 항리에서 물을 담았어야 했는데 안개에 깜박 잊고 말았다.


갑자기 길이 없어졌다. 마당만한 평평한 초지에서 길이 사라져 버렸다. 난감했다. 왼쪽으로 난 길은 산꾼이나 다님직한 풀숲길이다. 몇 걸음 나아가기도 힘들다. 하는 수 없니 초지를 가로질렀다. 비로소 길이 나타났다. 한참을 그렇게 올랐다. 시간은 한 시간을 이미 넘기고 있었다. 등대는 보일 기미가 없고 길은 점점 짙은 숲으로 이어졌다. 항리에서 만난 해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등대는 지금쯤 여행자 앞에 분명 나타났어야 했다.


다시 길이 두 갈래로 나왔다. 아무런 이정표도, 그 흔한 등산객의 리본도 없다. 지도를 보니 가파른 길이 독실산 방면일 것 같았다. 해안 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몇 갈래로 길이 흩어지더니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 나왔다.

가파른 비탈길로 걸어갔다. 오르막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등대가 아니라 독실산 가는 길인가 보다.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항리에서 출발한지 2시간이 흘렀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처음에 보았던 산길이 계속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초지까지 돌아왔을 때 아뿔싸! 후회가 밀려왔다. 오를 때에는 한참을 걸은 듯했는데 막상 내려와 보니 금방이었다. 뜨거운 햇살과 습기에 지친 몸이 거리 감각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를 보고 거리를 다시 꼼꼼히 따져보았다. 독실산 방면으로 추측되던 오르막길이 등대가는 길이 맞았다. 젠장,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속이 타들어갔다. 입을 최대한 모아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이제 딱 한 모금밖에 남지 않았다. 다 마셔버려. 강한 유혹이 일었다. 한 모금만 더 마시면 갈증이 갈 듯한데. 참았다. 이 적은 한 모금이 나중에 큰 공을 세울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행 중 왔던 길을 다시 걷는 것만큼 유쾌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 번이나 같은 길을 걸었으니 섬이 비로소 내게로 왔지 않았나.’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다만 등대지기가 이 길을 매일 올랐다고 생각하니 이쯤이야 얼마나 멋진 풍류인가라는 생각이 일순 들었다.


비바람에 쓰러진 고목이 길을 막았다. 사람이 다닌 흔적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고목을 제자리에 그대로 둔 사람들이 고맙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 결국 뭇 생명들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 묻힌다는 아주 단순한 순리를 우리는 종종 잊곤 한다.

콩짜개덩굴. 주로 남쪽 해안지대나 섬의 고목이나 바위에 붙어 자란다.

쓰러진 고목은 마치 ‘속인들 출입금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고목을 조심스레 넘자 거짓말처럼 원시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숲에 빼곡한 나무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엉켜있다. 아! 그냥 풀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아예 드러누웠다. 땅에 가장 낮게 바짝 붙어있으니 높은 하늘이 제대로 보인다. 하늘을 향해 뻗은 수십 수백의 나무들.

콩짜개덩굴

침묵. 깊은 적막을 깨고 바람이 분다. 숲이 흔들린다.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다시 침묵.... 새가 지저귀고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깊은 적막이 흐르고 숲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숲이 기를 불어넣었는지 힘이 난다. 길바닥에 소똥이 더러 보인다. 섬 곳곳에서 염소는 많이 보았지만 소는 본 적이 없는데.... 무언가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냅다 뛰었다.


‘항리마을-1시간, 신선봉-2분’ 이라고 적힌 종이 표지판이 소박하다. 여기서 항리마을로 돌아가는 데만 1시간, 등대까지도 1시간 거리였다.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신선봉이 지척이다. 일단 신선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남성

신선봉은 바위 봉우리였다. 거대한 암반 사이의 틈으로 신선봉에 올랐다. 신선봉 정상은 장정 수십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안개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멀리 울창한 수림 위로 우뚝 솟은 독실산 정상이 보인다. 정상은 신선봉과 더불어 암봉이다.

벼랑 끝 진달래가 위태위태하다. 뭍에서는 진즉 진 진달래가 바다 건너 외딴 섬의 5월에 피어있다는 게 신기했다. 바다를 덮은 안개가 산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몇 번 오르기를 시도하다 바람에 밀려 다시 내려가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끝내 산허리에 멈추어버렸다.

독실산 정상

바람이 서늘하다. 마치 거대한 자연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가슴 속으로 냉기가 파고든다. 지친 몸이 금방 생기를 찾는다. 숲으로 다시 돌아와서 한참을 망설였다. 시간이 다섯 시를 넘기고 있었다. 어떡할까. 등대까지 1시간을 더 가야했고, 항리마을까지 두 시간, 다시 민박집이 있는 1구 대리마을까지 6km를 더 걸어가야 했다. 빨리 걷는다 해도 9시를 훨씬 넘겨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냉정하게 판단하면 돌아가야 했다. 초행길이여서 무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목포까지 4시간, 다시 가거도까지 4시간 30분 뱃길. 한 번 들어오기가 여간 어려운데 등대를 못 간다는 것이 내내 아쉬웠다. 그래도. 그래도. 여행이란 늘 그런 법,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그래야 다음이 있는 법이다.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한 번 만으로 그 섬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일. 구석구석 섬을 온몸으로 느끼려면 가거도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와야 할 것이다. 목이 말랐다. 물통은 이미 비어 있었다. 바위틈에 겨우 물의 흔적이 있었다. 그거라도 마시고 싶었다.


계곡이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멧돼지일까. 가거도에도 멧돼지가 있는 것일까. 작년 거제도 망산 봉수대에 혼자 올랐다가 갑자기 나타난 멧돼지 5마리에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온몸에 식은땀을 줄줄 흘렀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마침내 숲 사이로 형체가 보였다. 바짝 긴장한 채 숲을 응시했더니 ‘휴’ 사람이었다. 하나둘 모습을 보이더니 여러 사람이 나타났다. 반가웠다. 취나물과 산더덕을 채취하고 있다고 했다. 등대를 다녀오느냐고 그중 한 사내가 물었다. 신선봉만 보고 오노라고 아쉬워했더니 길이 험하여 이 시간에는 등대까지 가기 힘들 거라고 여행자를 위로하듯 말했다.

인사를 하고 항리로 향했다. 내려오는 길은 의외로 빨랐다. 마을 가까이 왔을 때 순간 걸음을 멈췄다. 짙은 안개에 묻혀있던 섬등반도가 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 황홀한 순간, 숨이 멎는 듯하여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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