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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바람이 드나드는 알뜰한 옛집, 동호리 이씨고가



바람이 드나드는 알뜰한 옛집,
동호리 이씨 고가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좌 안동'이라 할 때 안동만을 가리키지 않듯이 '우 함양'을 말할 때도 함양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향촌의 사대부들이 그 지역의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중심계층이었다. 그중 가장 왕성했던 문화권이 바로 경상좌도에는 안동 일대였고, 우도에는 함양 일대였다. 함양을 중심으로 산청, 거창, 합천 등이 '우 함양'의 근간이 되었다.
 


거창 웅양면 동호리도 그런 향촌의 체취가 눅진하게 고여 있는 곳이다. 봉우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산골마을인 동호리에는 미수천이 흐른다. 마을이 시내의 동쪽에 있어 동변리로 불리다 이곳에 살던 진사 이지유의 호를 따서 동호리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쳉이(키)설이라 하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서 살수록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마을의 제일 안쪽에 이씨 고가가 있다. 조선말기 순조 때 지었다는 옛집이다. 집 앞으로는 작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산 능선을 옆에 끼고 집은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행랑채를 들어서면 ‘동호재’라고 이름 붙인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는 이 집을 지은 이지악의 조부인 이지유의 호를 따서 ‘동호재’라 하였다. 사랑채는 3칸으로 앞으로 마루를 두고 뒤로 방을 들였다. 가운데 방이 앞으로 약간 돌출되어 마루 가운데 부분이 반 칸으로 작게 되어 있다.


사랑채를 둘러보다 특이한 것을 보았다. 고택들을 더러 보았지만 방과 마루 사이의 외벽 위쪽에 구멍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다락인가 여겼더니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일종의 환기창인가 궁리하고 있는데, 마침 종부가 나왔다.

"할머니, 이 구멍이 뭔 줄 아세요?"
"그거 말이요. 아마 통풍하라고 만든 걸로 알고 있는데...."

흔히 통풍을 위한 장치는 부엌 위에 존재한다. 남도에서 볼 수 있는 솟을지붕이나 경북 지역에서 더러 보이는 까치구멍이 그것이다. 물론 봉창도 있지만 말이다.

"방과는 연결이 됩니까?"
"아닙니더. 방에서는 저 구멍이 안 보이지요. 천장에 막혀서리."

그제야 지붕 아래 서까래 등의 부식을 막는 통풍을 위한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집이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도록 실용적인 면을 중시한 집 지은 이의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종부는 상주시 우산에서 시집온 진양 정씨 할머니였다. 지금은 이곳에서 계속 살지 않고 도시에 있는 아들네 집과 이곳을 번갈아 가며 사신다고 하였다. 집이 관리가 안 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집 청소를 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고.

"집 보수를 했는데, 잘못된 것이 너무 많아요."
한숨을 쉬는 종부의 눈에는 깊은 아쉬움이 배여 있었다.


사랑채 옆에 중문이 있다. 중문채는 작은 툇마루를 앞에 둔 두 개의 방이 있다. 아궁이가 중문의 통로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앞뒤로 퇴를 내었는데, 툇마루 한 쪽이 없는 중문채의 뒤는 문을 달고 그 위에 벽장을 설치했다. 여기서도 실용성이 돋보인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생활에 맞게 집을 지은 흔적은 곳곳에서 보인다. 사랑채 마루 벽에 시렁을 설치한 것도 모자라서 뒷벽에도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시렁을 벽을 따라 길게 만들었다.


안채에서도 이 집이 얼마나 실생활을 염두에 두고 지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안채는 앞면 5칸 반, 옆면 2칸의 규모이다. 부엌이 1칸, 대청이 2칸, 안방과 건넌방이 각각 1칸인데 반 칸 폭의 툇마루와 벽장을 두었다. 건물 옆으로도 툇마루를 두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건넌방은 아궁이 위로 올림마루를 두었다. 올림마루는 실용적인 면도 있지만 누
가 없는 주택에서 누의 역할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할머니, 여기에 우물이 었었습니까?"
"아니라요. 원래 집을 지을 때부터 우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마을에 있는 공동우물을 사용했겠습니다."
"오데요, 수도가 없던 옛날에는 직접 물을 길어다 먹었지요. 집에 물을 긷는 머슴이 있었지요. 요 위에 계곡물을 매일 길어 와서 부엌에 있는 독에다 물을 가득 채워놓곤 했지요. 그때만 해도 물맛도 좋고 정말 물이 깨끗했지요."


곳간채는 견고한 성채를 연상케 했다. 벽두께는 얼핏 보아도 1m는 족히 되어 보였다. 곳간채는 맞배지붕으로 한눈에 보아다 튼실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곳간채 옆에는 마구간채가 있다. 아직도 디딜방아가 그대로 있고 옛날 구유가 그대로 남아 있다. 통나무를 길쭉하게 파낸 나무 구유와 돌을 통으로 깎은 돌구유가 각기 하나씩 있다. 마구간 위는 별도로 시렁을 두어 농기구를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집을 돌아보다, 마당이며 뒤뜰에 유난히 큼직한 바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란에 모여 있는 널찍한 바위들이 혹시 장독대의 용도는 아닐까 했는데 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평평한 바위들이 더러 나와서 일꾼들에게 한곳에 모아두라고 일렀다고 했다.
“집 주위로 큼직큼직한 돌들이 워낙 많아요.” 종부가 말했다.


이씨 고가는 일정한 형식보다는 실생활에 맞게 지은 집이다. 화려한 권위보다는 세심한 실용성이 잘 드러나 있다. 남부지방 민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집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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