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노비를 위해 비석을 세웠을까?
함안군의 중심지인 가야읍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길 오른편으로 수십 그루의 왕버들에 둘러싸인 멋진 연못을 보게 된다. 연못 가운데는 다리가 놓여 있고 예쁜 영송루와 바위 언덕에는 무진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무진정은 무진정 조삼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명종 22년인 1567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다. 지금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한 것이다.
무진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부자쌍절각이 있다. 이 쌍절각은 어계 조려 선생의 6세손이자 무진정 조삼 선생의 증손인 승지공 조준남과 그의 아들 선전공 조계선의 효와 충을 기려 세운 전각이다.
부자쌍절각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쳐들어와 승지공의 증조부인 집의공의 묘를 파헤치자 조준남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 흙으로 관을 덮으니 적들이 위협하였다. 이에 승지공은 “선조의 묘소를 무단 발굴하니 불공대천의 원수다.”라고 하며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조계선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627년 정묘호란 때 전사하였다. 이 두 부자를 기려 전각을 세웠다.
충노 대갑의 비
부자쌍절각 옆에 비석 하나가 있었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오늘 다시 보니 조금은 특별한 비석이었다. 비석에는 <忠奴大甲之碑충노대갑지비>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노비를 위해 비석을 세웠을까.
비석의 문구를 자세히 보았으나 짧은 문리는 어쩔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뒤져봐도 충노 대갑에 대한 자료가 없었다. 이래저래 고민하다보니 함안 조씨 대종회에서 그 흔적을 몇몇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내용이 부족해 전 교수에게 비문 해석의 도움을 받아 충노 대갑의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도와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몇 글자는 정확한 판독이 어려워 앞뒤의 문맥으로 유추하였다.
함안 조씨의 기록과 비문을 대조해 보니 대강의 내용은 이러했다. <정유재란 당시 노비 대갑이 주인 조계선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했는데 조계선이 전사하게 되자 함께 죽는 것이 옳다고 여겼으나 공의 죽음을 전할 길이 없어 살기로 결심했다. 의주에서 돌아와 본가 5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조계선의 부음을 전하며 “혼자 살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 주인을 난에서 구출하지 못하여 집에 갈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 지금의 검암천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의롭구나! 이 노비.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럼이 없다네. 고금에 드문 일이니 비석에 적노라.>
정유재란 때 전사한 주인을 따라 죽은 노비 대갑은 이렇게 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 시대의 눈으로 보는 것이 때론 옳은 방법이기도 하다.
조준남과 그의 아들 조계선을 기린 비는 전각에 있는 데 비해 노비 대갑의 비는 주인 옆에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노비에게 전각까지 짓는 일은 무리였나 보다. 그래도 노비를 위해 비석을 세웠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그래서 이 비석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진정은 연못 바닥을 정비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었다. 무진정은 사시사철 좋지만 겨울에는 다소 삭막하다. 연둣빛에 물드는 초봄이나 비오는 여름, 단풍이 지는 가을에 가면 그윽한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2008년 여름의 영송루와 무진정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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