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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1박2일이 찾아간 조선최고의 상류주택, 선교장

 
 
 



1박2일 팀이 하룻밤 묵은 조선 최고의 상류주택, 선교장

지난 9일, 1박2일 팀이 강릉 경포대와 경포해수욕장을 찾았다. 경포대는 바다라고 착각할 정도로 넓은 석호이고 경포대해수욕장은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1박2일 팀은 흔히 ‘조선 최고의 상류주택’이라고 불리는 선교장에서 1박을 했다. 선교장은 과연 어떤 곳일까?


대관령을 넘어 경포호 못 미쳐 노송 수백 그루가 우거진 골짜기에 선교장이 있다. 옛날 경포호가 장장 30여 리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였을 때에는 선교장을 배로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선교장이 있는 곳을 '배다리'라 불렀고 집 이름도 배다리의 한자인 '선교장船橋莊'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으로 가선대부였던 무경 이내번이 집터를 잡았다. 이내번이 충주에서 강릉으로 옮겨와 경포호 주변의 저동에서 자리를 잡은 후 가산이 일기 시작하여 좀 더 너른 터를 찾던 중 족제비 한 떼가 나타났다. 족제비 떼가 무리지어 이동하는 걸 보고 쫓아갔는데, 어느 야산(시루봉)의 울창한 솔숲으로 족제비 떼가 갑자시 사라졌다.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과 안채, 외별당 전경

잠시 어리둥절했던 이내번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 산세를 둘러보았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줄기가 평온하게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는 이곳이 천하의 명당임을 발견하였다. 이내번은 하늘이 족제비를 통해 훌륭한 터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곧 새집을 짓고 이사했다고 한다.

행랑채 솟을대문은 사랑채로 가는 남자들의 대문이다.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의 '선교유거' 현판이 있다.
 오른쪽에 안채로 가는 여자를 위한 평대문이 별도로 있다.

총건평이 318평에 달하는 선교장은 긴 행랑채와 사랑채인 열화당, 중사랑, 곳간채, 안채, 별당, 가묘, 후원으로 구성된 강원도에서 가장 큰 조선시대 상류 사대부집의 전형이다. 문 밖에는 활래정까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인 열화당

행랑채에는 대문이 두 개 있다. 왼편의 솟을 대문은 사랑채로 가는 남자들이, 오른쪽 평대문은 안채를 이용하는 여자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솟을대문에는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을 지닌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열화당의 차양,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준 것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왼편으로 가면 사랑채인 열화당이 있다.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에서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리라......"
"친척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고悅親戚之情話" 의 '悅'과 '話' 자를 따서 '열화당'이라 하였다.

                                열화당 아래의 아궁이 문

열화당은 순조 15년인 1815년에 오은처사 이후가 지었다.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딛고 올라서야 될 정도로 높직하니 자리 잡고 있다. 처마가 높아 앞에 별도의 차양이 있는데, 이는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서 선물로 지어준 것으로 러시아식 건물이다.

중사랑은 주로 손님맞이에 사용된 건물이다.

열화당의 오른편에는 육중한 중사랑이 있다. 주로 손님맞이에 사용되었던 건물로 전국의 학자, 풍류객들과 교분을 나누던 곳이다. 선교장의 건물 특색을 이야기할 때 흔히 추운 지방의 폐쇄성과 따뜻한 지방의 개방성이 공존되어 있다고 한다.

행랑채

사랑채인 열화당은 선교장 개방성의 대표작이다. 아늑하면서도 다소 답답한 안채의 분위기와는 달리 사랑채는 높이 앉은 건물과 넓은 마당으로 인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사랑채 뒤로는 초정이 하나 있다. 노야원으로 불리는 후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공간이다. 우람한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안으로 담장을 둘러 선교장의 생활공간을 구분 짓는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선교장의 고래등 같은 지붕과 노송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후원의 노송과 선교장

지금은 논밭이 되어버린 경포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기대할 수 없건만 "언덕이 둘러 있고 시내가 감싼 "선교장의 넉넉한 풍경은 변함이 없다. 조인영은 선교장을 두고 "경포호와 동해를 선교장의 문과 정원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극찬하였다. 권영좌는 "선교장의 주인은 산에 살면서 바다의 경치도 겸하여 가졌다" 고 하였다. 후원 언덕에 올라 선교장을 내려다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노야원과 선교장

대관령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오죽헌에서 잠시 멈추었다 다시 동북쪽의 시루봉으로 한번 치솟고 경포대까지 뻗어 가면서 여러 갈래 작은 산줄기들을 만들어낸 자리에 선교장이 터를 이루고 있다.

서별당은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며느리에게 살림을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선교장은 갑오농민전쟁과도 관련이 있는데, 강릉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이 선교장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계획을 당시 선교장의 주인이었던 승지 벼슬을 지낸 이희원이 이를 알고 농민군에게 돈과 쌀을 보내 안심시켰다. 그런 후 민보군을 조직하여 강릉 관아로 쳐들어가 방심하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많은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대관령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희원은 강릉 부사로 임명되었고 강원도 농민군을 토벌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고 한다.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맞이에 사용되었으며 안채의 건물 중에는 개방적이고 활달하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이곳을 지나간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다. 이곳 곳간채는 1908년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로 개조하여 신학문으로 지역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

      안채 내부

2000년에 한국방송공사(KBS)에서 20세기 한국 TOP10을 선정할 때 선교장은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되었다. 선교장은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에 있다.

안채주옥. 1703년에 지은 선교장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바깥에서 본 행랑채. 장대하기도 하려니와 열 지어 선 굴뚝들이 이채롭다.

사당(가묘)

외별당은 맏아들의 신혼살림이나 작은 아들이 분가 전에 사용하던 건물이다.

활래정은 1816년 이근우가 중건하였다. 연못 속에 네 개의 돌다리를 담그고 있어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탁족하는 선비의 모습이 연상된다. ㄱ자형이나 실은 두 개의 정자가 붙어 하나로 보인다.

선교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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