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아주 놀라운 뒷간!
-뒷간만 봐도 주인의 안목이 보인다.
지난 일요일은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에도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습니다. 500여 년이 넘었다는 산청 정당매를 보러 갔건만 매화는 아직 봄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거창으로 향했습니다. 그날처럼 봄볕이 강한 날에는 시원한 솔숲이 제격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산 높고 물 맑은 거창에는 오랜 고택들이 많습니다. 웅양면 동호리도 고택들이 돌담 깊숙이 자리한 곳입니다. 이곳의 돌담은 옛 마을 어디에 견주어도 아름답습니다. 봄빛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돌담을 스멀스멀 넘어갑니다. 이씨 고가로 가던 중 돌담 사이에서 특이하게 생긴 작은 건물 한 채를 보았습니다.
무슨 용도일까? 궁금증이 생기면 참지 못하는 여행자입니다. 제법 오래된 듯한 집은 대문도 없습니다. 문을 다는 대신, 돌담을 쌓지 않은 공간의 소통이 돋보입니다. 사람이든 바람이든 그저 헛기침 한 번으로 드나들면 그만입니다.
“어험” 헛기침을 크게 해보았습니다. 주인에게 건물의 용도를 물어볼 요량이었습니다. “멍멍멍” 개만 짖었습니다. 아주 잘생긴 개였습니다. “어험” 다시 한 번 목청을 높였습니다. “멍멍멍, 멍멍멍” 이런! 이웃집 개도 덩달아 짖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개가 돌담 너머로 얼굴을 빼죽이 내밉니다. “멍멍멍” 기에 눌릴세라 여행자도 같이 짖었습니다.
이러다간 동네 사람들 다 나오겠다 싶어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습니다. 마침 옆집의 대문에서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아주머니, 이게 뭔 줄 아세요?”
“아, 그거요. 화장실입니다. 뒷간이죠.”
“최근에 지은 것은 아닌 듯한데....”
“예, 어디서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에는 시인이 살고 있답니다. 저 뒷간은 시인이 살기 전부터 있었는데, 헐지 않고 지금도 뒷간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아, 그렇군요. 시인은 지금 없나 봅니다. 아무리 인기척을 해도 개만 짖네요. 허.”
“어디 나가신 모양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여인은 골목길로 총총 사라졌습니다.
허름한 슬레이트를 머리에 이고 있는 뒷간의 정겨움에 자꾸만 눈길이 갔습니다. 누런 황토로 벽체를 바르고 중간 중간 나무를 세워 비바람을 견딜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달려 있고 밖으로는 널판을 대어 바람이 드나들게 하였습니다. 여차하면 변도 이 널판을 통해 세상구경하겠지요.
시인의 마음이 하도 아름다워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시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뒷간 하나만 봐도 주인의 안목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사치일 수 있으나 아름다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처럼 소담한 뒷간을 보여준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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