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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옛 기억을 찾아 떠난 미륵사지의 황혼

옛 기억 찾아 떠난 미륵사지의 황혼
- 상상으로 텅빈 절터의 옛 모습을 채워가다.

미륵사지 가는 길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 조선 정조 때의 선비인 강유진이 미륵사지를 유람하고 쓴 '와유록臥遊錄'에 적힌 내용이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되어 고려까지 성황을 누리다 조선 중기 이후 폐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미륵사는 이 때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십 수년 전 내가 미륵사를 처음 찾았을 때의 황량함도 그에 못지 않았다. 옛 절터에 쓸쓸히 서 있는 석탑에 한참을 머물렀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자리를 뜰 정도로 미륵사의 첫 경험은 두고두고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서석탑 앞에 늘씬한 당간지주 두 기가 있다.

당시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주위에는 논밭들이 여전히 있었고 절터는 주민들의 삶의 공간과 떨어져 있지 않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쓰러질 듯한 석탑 한 기, 단정하면서도 웅장한 당간지주 두 기, 너른 터 바닥에 피운 한 떨기 꽃처럼 목탑터 앞 석등받침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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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세월이 세상에 드러낸 건 그것 뿐이었다. 황혼이 지는 폐사지의 깊은 적막이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아무 것도 없음으로 인해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미륵사지의 옛 모습을 그려보며 텅빈 절터를 하나 둘 채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미륵사지와 미륵산(용화산)

근래에 복원한 동석탑은 다소 생경스럽다.

마를 캐어 팔아 살던 맛동이가 어찌하여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는가.  "선화공주가 맛동을 남몰래 숨겨 두고 밤마다 안고 논다."  한낱 맛동이에 불과하지만 어머니가 못의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으니 예사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역사적 사실을 일일히 들여다 보는 것은 흔히 상상력만 고갈시킬 뿐이다. 전설과 설화는 때론 가감없는 원형만으로 이야기할 때 더 살뜰해지는 법이다.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무왕이 사자사로 가던 중 이곳 용화산(미륵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물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미륵삼존에게 예를 올리고, 이곳에 절을 세우자는 선화공주의 말에 무왕은 못을 메워 미륵사지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절터 아래는 뻘흙이니 미륵사 창건이야기는 설화가 가미되었다 하여도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폐사지를 해질녘에 찾는 이유가 있다. 특히 미륵사지는 발굴 후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폐사지의 흔적보다는 잘 정돈된 공원같은 느낌을 준다. 대낮에 오면 옛 절터의 무상함보다는 단지 길 위를 산책하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근래에 지은 동석탑이 다소 생경하다. 서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비바람에 견디다 보니 몸이 상하여 치료중에 있다. 늘씬한 당간지주 두기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에 그 옛날의 미륵삼존이 다시 나타날 듯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