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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소풍가고 싶은 절집, 능가산 개암사

소풍가고 싶은 절집 능가산 개암사
- 변한과 백제의 옛 왕궁터

개암사 입구의 한 민가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고요히 자리잡고 있는 절집이 있다. 굳이 불교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잠시 일상의 번잡함을 피해 쉬어가고 싶은 곳, 멍하니 앉아 어둠이 내리는 절마당을 울리는 종소리에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곳, 그것이 바로 마음속의 절집이 아닐까?


부석사가 장쾌한 풍광을 자랑한다면 봉정사는 품에 안긴 듯 아늑하다. 대흥사가 깊은 절집이라면 미황사는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앉음새가 예사롭지 않다. 내소사의 정갈함이 일품이라면 개암사는 깊으면서도 경쾌하다. 이름난 대찰이 주는 위용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러나 큰 절집 옆의 작은 절집은 그 호젓함을 즐기는 이들만 가게 된다.
 

내소사의 가을를 완성하려고 갔으나 초입부터 막히는 차량들로 인해 개암사로 향했다. 내소사를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절집이 '개암사'이다. 근래에 세운 일주문이 다소 생경스럽지만 개암사는 옛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절집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절마당에 이르는 짧은 길이 아쉬울 법도 하지만 그 짧음이 되려 숨막힐 듯 아름답다. 오래된 고목과 간간이 섞여 있는 단풍나무, 바닥에 냇돌을 깐 이 길은 짧음의 아쉬움을 채우려 오른쪽으로 느긋하게 굽어 있다. 바로 절집으로 이어지는 당황스러움을 한 숨 돌려 갈 수 있게 배려한 여유있는 길이다.


개암저수지를 몇 번이나 굽어 돌아가야 이르는 개암사는 내소사의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절집 자리는 그 옛날 마한의 왕궁터였다고 한다. 변한의 문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고 우와 진 두 장수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을 짓게 하여 동쪽의 전각을 묘암이라 하고 서쪽의 것을 개암이라 하였다.



우와 진이 죽고 내란이 일어난 후 문왕의 뒤를 이어 30년간 재위하던 마연이 살해되었다. 변한의 유민들이 이 두 장수를 잊지 않기 위해 성 위의 두 바위를 우진암이라 하고 바위가 있는 산을 '변산卞山'이라 하였다. 나중에 이 말이 '변산邊山'으로 바뀌게 되었다.


개암사는 백제 무왕 때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쳐 개암사와 묘암사로 각각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오른쪽으로 굽은 길의 막바지에서 층계를 오르면 울금바위를 배경으로 대웅전이 날아갈 듯 경쾌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깊은 산중에 널찍한 절마당이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위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대웅전의 아름다움에 다시 놀라게 된다.


절집 뒤의 울금바위를 변한의 유민들은 우진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소정방이 김유신을 만난 곳이라 하여 우금암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이 바위를 기점으로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이곳 부안에 살던 이름난 여류시인이자 기생이었던 매창은 개암사를 무척 사랑하였다. 내소사에 살면서 개암사에 소풍가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그후 매창이 죽자 부안의 아전들이 그가 생전에 자주 찾던 개암사에서 시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