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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고요한 산사의 아름다움 '천은사'

고요한 산사의 아름다움 '지리산 천은사'
- 이슬처럼 맑은 감로수에 마음을 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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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조선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물 흐르듯 쓴 '지리산 천은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개인적으로 대찰보다는 호젓한 산사를 좋아한다.
대찰이 주는 규모와 역사가 있다 할지라도 번잡함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암사, 청량사, 운흥사, 개암사, 청량사, 미황사 등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절집을 자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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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홍루 계곡물이 호수와 만나는 풍광 좋은 곳에 있어 각종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천은사.
지리산에서 암자를 제외하고는 가장 좋아하는 절집이다.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지리산이지만
천은사는 아직은 호젓하고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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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 알려지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래도 해질녘에 가서 절집 마루에 걸터 앉아
저물어 가는 지리산을 바라보는 맛은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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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현판에 물 흐르듯 쓰여져 있다.
조선 4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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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인도 승려인 덕운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유력했으나,
최근 도선국사 창건설과 중창설, 덕운선사의 중건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그 창건 시기와 유래를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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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甘(感)露寺로 불리다,
임진왜란으로 절이 불탄 뒤 숙종 5년인 1679년에
단유선사가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절이름을 천은사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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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단유선사가 절을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한 스님이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후 잦은 화재와 불상사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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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이 쓴 글씨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마을 사람들은 절의 물기운을 지켜주는 뱀을 죽인 탓이라며 두려워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얼마 뒤 천은사에 들린 원교 이광사가 물 흐르는 듯한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을 써서 일주문에 현판을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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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수홍루를 지나면 감로수라는 샘물이 있다.
이 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 하여 한때는 몰려든 스님들이 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선원'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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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은 낮은 담을 쌓아 경계를 드러내면서도 주위 솔숲과 퍽 어울린다.
일주문의 화려함과 낮은 담의 소박함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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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수홍루를 향하니 스님 한 분이 마주 온다.
잠시 합장을 하고 저물어 가는 절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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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이 수홍루 아래를 흘러 호수로 간다.
가뭄이 심해서인지 호수는 바닥을 드러내었다.
호수에 물이 가득하면 마음마저 풍요로운데, 오늘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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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수를 마시고 계단을 오르면 족히 수백년은 되었을 법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널찍한 절마당에 서 있다.
절마당 끝나는 곳에 보제루가 우뚝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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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는 입구에서는 2층이지만 극락보전에서 보면 단층 맞배집이다.
층계에 앉아 경내를 훑어보는 맛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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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뒤에는 근래에 새로이 전각들이 들어 섰다.
전각 앞마당의 둥실한 바위는 오가는 불자들이 하나 둘 올린 돌이 정성스레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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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절마당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렸다.
깊이 빠져드는 적막에 절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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