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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아름다운 강변 사찰 '신륵사의 만추'

아름다운 강변 사찰 '신륵사의 만추'
- 사공은 간 데 없고 물안개만 자욱하네

김지하 시인의 '남한강에서'가 절로 생각나는 신륵사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의 물안개

십여 년 전 여주에 들렀을 때 신륵사와 영릉, 고달사터를 들렀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누리 선생님이 어디를 가고 싶냐고 하였다. 도자 공방의 가마 불 때는 것은 전체 공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말에 다음에 기회되면 몇 일을 두고 촬영을 하고 오늘은 간단히 산책 겸 신륵사가 좋겠다고 하였다. 스님들이 가는 한적한 산길로 선생님이 안내를 하였다. 역시 문화재 전문가 답게 말이다.

신륵사의 얼굴격인 은행나무는 이미 황금빛을 토하고 있었다.

절집 차세움터에 도착하니 다행히 인적이 드물다. 나에게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고요한 절집으로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물안개가 피어 올라 강변은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다. 피안의 땅이 예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상한 안개속에 절집은 자리하고 있었다. 낙엽이 깔려 있는 강변길을 부러 소리내어 밟아 본다. "사각사각"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선사의 호를 따 이름을 붙였다. 한사님과 온누리님이 강풍경을 가늠하고 있다.

앞서가는 두 분 앞으로 햇살이 비춘다. 안개로 인하여 빛이 덜하여 실루엣이 약하다. '三人行必有我師' 했던가. 3일 동안의 동행도 오늘로 끝이 난다. 아쉬움이 들어 멀리서나마 두 분의 모습을 담아 본다. 가까이서 찍으면 보는 이도 찍힌 이도 그다지 즐겁지 않으리라.

강월헌에서 남한강을 안개에 담아 강심을 낚는 한사님

신륵사가 강변 사찰의 으뜸이라는 건 강월헌에 올라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바위 위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다. 남한강이 굽어 보이는 강월헌은 안개와 바람, 햇살이 멈추는 곳이다. 그 옛날 조포나루에서 강을 건너 신륵사로 들어갔다 하니 얼마나 운치가 있었겠는가. 국적 없는 노래가 절집 주위를 어지럽히는 오늘, 왠지 모를 서글픔이 몰려 든다.

강월헌 앞 암반의 삼층석탑과 안벽

절마당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은 여강으로도 불리던 남한강이다. 앞은 강, 뒤는 숲, 옆은 안벽岸壁이라 불리는 절경에 신륵사는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운 강변 풍경을 자랑하는 신륵사를 오늘 다시 보니 세월이 무상하다. 한적하던 분위기도 잠시 한 무리의 인파들이 모여 들어 절집은 정신이 없다. 게다가 공사 소음으로 인해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신륵사 건물 중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는 조사당과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선사를 추모하여 심었다는 향나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그후 조선조 들어 스러져가던 신륵사는 세종의 영릉이 광주 대모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왕실의 원찰이 되어 번성하게 된다.

빽빽한 솔숲에 둘러 싸인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석종 부도는 기단이 높아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신륵사神勒寺의 절 이름에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강 건너 마을에서 사납고 거친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다룰 수가 없었다. 이때 인당대사가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우왕 때 마암馬巖이란 바위에서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굴레를 씌워 용마를 막았다는 설이다. 신력의 과 말을 다스리는 굴레 자가 합쳐 신륵사라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다층석탑이 특이하다. 석탑에 용이 새겨진 것도 그러겠거니와 조선시대의 탑인 데도 고려 이전의 양식이다. 

금당 왼편으로 가면 무성한 솔숲을 배경으로 아담한 조사당이 예쁘게 앉아 있다. 늘 푸른 향나무 한 그루가 조사당 앞마당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600년 이상이나 향기로움을 피워 온 나무의 자태가 사뭇 아름답다. 지공, 나옹, 무학 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깊숙하고 성스러운 곳이 아닐까 싶다. 기울어가던 고려 말의 한 줄기 빛이었던 세 분이 모셔져 있으니 말이다. 무학이 스승 나옹을 추모하여 심은 향나무는 오늘도 청정한 향내를 품어 낸다.


조사당 뒤로 난 계단길을 올라가면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다. 양주 회암사에서 나옹선사로 인해 밀려드는 신도로 인해 조정에서 산문을 닫고도 막을 수 없자  밀양 형원사로 가게 하였다. 나옹선사는 형원사로 가던 도중 병이 깊어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종모양으로 생긴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석종부도가 있는 이 언덕 일대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명당 자리로 알려져 있다. 빽뺵한 소나무 숲에 둘러 싸인 부도는 보기에 너무나 장중하여 나옹선사의 법력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부도 앞에는 아름다운 석등 한 기가 놓여 있다.


신륵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층전탑이다.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려 고려 때에는 '벽절'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강가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은 그 선자리가 매우 호쾌하다. 남한강과 여주의 너른 평야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다.  대개의 탑이 금당 가까이 있으나 이곳은 외따로 떨어져 있다. 이유인즉슨 하대 신라의 풍수지리설과 맞물려 있다. 즉 허한 자리를 보하여 땅의 기운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층전탑,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이 탑으로 인해 고려 때에는 '벽절'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조용하던 아침 나절의 강변 절집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한 무리의 아주머니 부대가 들이 닥치더니 이내 수백여 명이 한꺼번에 절마당을 가득 채운다. 낮잠을 자다 후두둑 떨어지는 소나기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약간은 놀란 마음을 안고 절집을 빠져 나왔다. 헤어짐이 아쉬운 듯 여주에서 끝내 작별을 하지 못하고 다시 용인까지 가서야 한사님, 온누리님과 작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