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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길

부용대 절벽에 꼭꼭 숨은 하회마을 '층길'을 걷다

 

 

 

 

부용대 절벽에 꼭꼭 숨은 하회마을 ‘층길’을 걷다

- 류성룡, 류운룡 두 형제가 오가던 하회마을 ‘층길’을 아세요.

 

너무나 익숙한 하회마을, 그도 그럴 것이 하회마을에 가면 오래된 고택을 둘러보고 골목길을 걷다 보면 그 풍경이 그 풍경이라며 금세 심드렁해진다. 이런 이들에게 하회마을의 색다른 풍경을 선사해주는 것이 나룻배로 강을 건너 부용대에 오르는 것이다.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강줄기와 그 속에 연꽃처럼 떠 있는 물돌이 하회마을을 보고 나면 그때까지의 답답함이 일거에 해소된다.

 

 

이런 멋진 풍광을 선사하는 부용대도 이제는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되어 예전의 아름아름 알던 비경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그저 그런 풍경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좀 더 한갓진 곳을 찾고픈 여행자는 옥연정사를 나와 벼랑길을 접어들었다.

 

부용대의 오른쪽에 있는 옥연정사에서 왼쪽에 있는 겸암정사까지는 벼랑길인 층길이 있다.

 

사실 이 길이 있다는 걸 안 지는 오래되었으나 매번 잊어버리거나 입구가 어디쯤 있을까 생각만 하다 발길을 돌리곤 했었다. 해서 언젠가 찾아보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우연한 기회가 있었다. 마을 강둑에서 만난 류정하(77) 할아버지 일행에게서 전설(?) 속의 벼랑길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옥연정사에서 겸암정사 가는 길이 두 군데였어요. 벼랑에 두 군데 길이 나 있었는데 허물어지고 험해져서 이제 사람이 다닐 수 없고 지금은 그나마 하나만 겨우 다닐 수 있어. 아니면 부용대에 올랐다가 둘러가는 수밖에 없고…."

 

길이 보이세요?

 

강 건너에서 부용대를 바라봤을 때 저 60m가 넘는 거대한 낭떠러지 사이에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눈을 씻고 봐도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은 벼랑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강을 건너려 나룻배를 탔을 때 선주 류시중(55) 씨에게 벼랑길의 존재를 묻자 옥연정사에서 곧장 가면 된다고 손으로 벼랑길을 가리켰다.

 

길이 보이세요?

 

옥연정사를 둘러보고 간죽문을 나왔다. 강의 동쪽에 있는 옥연정사에서 절벽의 서쪽에 있는 겸암정사로 향했다. 벼랑의 초입은 낙엽에 쌓여 길이 분명치 않았다. 낙엽을 밟고 얼마간 지나자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정도의 오솔길이 벼랑 아래로 이어졌다.

 

 

정으로 절벽을 쪼아냈는지,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날 만한 길만 낸 벼랑길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수북이 쌓인 돌 부스러기나 낙엽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수십 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길에서 한 발 한 발 바짝 긴장하며 내딛다 보니 어느새 발바닥부터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길이 보이세요?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저도 모르게 몸이 으스스하고 털끝이 쭈뼛해진다. 아슬아슬하게 절벽 바위틈을 잡고 가다 거대한 절벽의 툭 튀어나온 암벽에 몸을 굽히기도 몇 번, 절벽 틈에 난 작은 나무라도 잡아야 그나마 안심하며 걸을 수 있었다. 낙동강의 푸른 물줄기와 하회마을의 멋들어진 풍경을 볼 마음의 여유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제 길이 보이시죠?

 

이 험난한 길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다녔을까. 옥연정사에서 겸암정사로 이어지는 이 길은 '층길' 혹은 '벼리길'이라 불렀다 한다. 토끼들이 자주 다니는 좁은 길이었다 하여 ‘토끼길’로도 불렀다 한다. 바로 부용대를 사이에 두고 옥연정사와 겸암정사에 기거했던 서애 류성룡과 그의 형 겸암 류운룡이 오가던 길이었다.

 

 

두 형제는 부용대 좌우에 각기 정자를 두고 학문에 힘쓰며 이 층길을 오가며 형제간의 우애를 다진 것으로 전해진다. 강 건너 하회마을에서 보면 옥연정사는 오른쪽인 동쪽에, 겸암정사는 왼쪽인 서쪽에 있다.

 

 

겸암정사는 지어진 해가 1567년, 옥연정사를 지은 것이 1586년이었으니 서애가 옥연정사를 지은 후에 겸암정사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던 형 류운룡을 만나러 갔던 길이었을 것이다. 그때가 400여 년 전의 일이니 길 또한 400년이 넘은 길이다. 발아래의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낙동강 물결이 정신을 아찔하게 하고, 하늘 높이 치솟은 절벽은 언제라도 와르르 무너질 듯 덮칠 기세다.

 

 

이 위태위태한 길을 서애와 겸암은 무슨 생각을 하며 오갔을까? 처음의 두려움도 잠시, 그들이 되어 침묵 속에 층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계속되는 벼랑길에 더 이상의 묵상은 불가능했다. 행여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을까, 절벽에서 돌은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몰려든 걱정에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 층길의 길이는 약 500m쯤 되어 보인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80년 전인 1828년 하회마을의 모습을 담은 산수화에서도 이 층길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놀라울 따름이다.

 

 

 

겨우겨우 겸암정사에 다다르자 상수리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입암 절벽 위에 버티고 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겸암정은 솔숲에 고요히 들어앉아 있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강 건너 모래밭과 송림,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형제의 우애를 다졌던 길이어서 그랬을까. 겸암정사 앞 강에는 ‘입암(立巖)’이라는 크고 작은 두 바위가 있는데, 이를 '형제 바위'라고도 한다.

 

 

 

'우리 형님 정자 지어 겸암이라 이름 붙였네 /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 발끝엔 향긋한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 내어 밤새 흐르네.’ 겸암정사 입구에 새겨진 시비에서 서애 선생의 형에 대한 애틋함을 읽을 수 있었다.

 

겸암정사

 

돌아오는 길은 위태로운 층길을 버리고 겸암정사에서 부용대를 올랐다가 옥연정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부용대에 올라 한 떨기 연꽃 같은 하회마을의 풍광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샅길을 샅샅이 걸을 생각이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

 

층길을 걷는 사람들

 

강을 건너 하회마을로 돌아오니 벼랑길에 매달린 사람들이 아득하다. 층길에는 뱀이 많다고 하니 놀라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조심 또 조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