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이상향,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불일폭포
만추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숲은 아직 푸르렀다. 어쩌다 한 번 보이는 붉은 잎사귀가 11월을 넘긴 농익은 가을임을 암시할 뿐 숲은 아직 겨울이 멀다 하였다. 쌍계사에서 국사암에 들렀다 곧장 불일폭포로 향했다. 이 길은 쌍계사를 베이스캠프로 삼은 옛사람들이 이상향을 찾아 오르던 길이기도 하다.
불일폭포 가는 길은 넓고 뚜렷하게 돌포장이 되어 있다.
거리는 2.5km, 1시간 30여 분이면 폭포까지 이를 수 있다. 지금은 불일폭포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아 길이 뚜렷한데다 돌포장이 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개울을 건너고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이내 ‘환학대’와 ‘마족대’에 이르게 된다. 고운 최치원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다닐 때 이곳에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환학대는 그나마 상상이 되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를 때 말발굽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마족대는 여간 뜬금없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아, 위에는 겨울인데 여기는 여름이네!” 두꺼운 옷으로 온몸을 감싸며 폭포 방향에서 산을 내려오던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건넨다. 다소 생뚱맞은 말에 뜨악했지만 불일평전에 이르렀을 때 온몸에 스르르 한기가 느껴지자 아까 등산객의 말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옛 선현들이 청학동으로 꼽기도 했던 불일평전의 들머리
불일평전은 예전 청학동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운다’ 는 전설의 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백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다. 조선조 김일손과 남명 조식은 이곳 불일폭포 주위를 청학동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계곡이 높고 가파르며 터가 너무 좁아 용납할 곳은 아니다’ 라며 청학동의 난점을 살짝 제기하기도 했다. 지리산에는 이 곳 외에도 악양 북쪽, 현재의 청학동, 세석고원, 선유동 등 청학동으로 불린 곳이 많다. 이들 모두 지리산에서 살기 좋고 비교적 너른 땅이 있는 곳이다.
불일평전의 봉명산장 휴게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오늘 산장은 텅 비어 있었다. ‘봉명산장’으로 불리던 휴게소는 털보할아버지 변규화 씨가 2006년 돌아가신 후 아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오니 빈집이 되어 있었다. 그가 쌓았던 소망탑 만이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고 샘물은 여전히 펑펑 솟아나고 있었다.
휴게소 위 골짜기에서 길은 갈라진다. 불일폭포까지는 300미터, 왼쪽으로 올라서면 삼신봉과 청학동 삼성궁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폭포로 가는 길, 여태까지의 넓고 평탄하던 길은 여기서 거친 바윗길로 바뀌고 낭떠러지와 가파른 길이 연이어 나타난다.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좁은 벼랑길을 걷고 있는데 숲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바람소리인가 여길 정도로 작던 소리는 점점 우레와 같은 소리로 변한다. 폭포가 지척임을 알겠다. 왼쪽 비탈에는 암자가 하나 있는데 불일암이다. 폭포 소리에 마음이 끌려 암자를 지나쳤다.
불일폭포는 높이 60m에 달하는 거폭이다. 그 웅장함을 사진으로 표현하기엔 역시 역부족..
깎아지른 듯이 위태로운 벼랑 아래로 한 번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 원시림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조심조심 발을 옮겨 나무계단을 내려선다. 계단이 놓이기 전에는 벼랑을 엉금엉금 타고 내려갔었다. 얼음이 언 겨울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기도 했다. 폭포 주위는 육산인 지리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지대다.
지금은 번듯한 전망대까지 있는 불일폭포는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서 쏟아진 물이 중간의 학연(鶴淵)에서 잠시 머물다 흘러내리는 2단 폭포다.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높은 60m의 거폭이다. 수량이 많은 여름에는 장관이다.
불일폭포 옆 불일암
돌아오는 길에 불일암에 들렀다. 암자는 고려 희종 때의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는데 입적 후 시호인 불일보조(佛日普照)에서 유래되었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으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지눌(1158~1210)은 40세 때인 1198년부터 1200년까지 함양 삼정산 상무주암에서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일체 바깥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수도에 몰두했는데 그가 이곳에 들렀다는 기록과 행적은 없다. 다만, 암자의 이름은 흔히 불교에서 부처를 가리키는 불일(佛日)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암자는 1980년대 초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새로이 지은 것이다.
불일암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았을 원시림이 깊다.
낭떠러지인 주변 지형으로 인해 암자 터는 비좁다. 겨우 건물 한 채가 들어섰고 몇 발자국 옮기면 이내 담장인 한 뼘 정도의 마당이 있을 뿐이다. 마당 끝에는 평상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곳에 앉아 담장 너머의 산세를 바라보는 맛이 깊고 그윽하다.
인간의 세상과는 한 번도 접촉하지 않았을 불가촉의 신성한 땅이 예가 아닌가 싶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저편 골짜기에서 푸른 학이 날아오는 듯하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의 깊은 고요와 겹겹 산 주름의 번뇌, 장하게 뻗은 노송의 고고함 사이로 바람이 헤집고 들어온다. 옛 선현들이 이곳을 청학동이라 끝내 자신하지 못했다는 건... 글쎄, 모를 일이다.
진감선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이 있는 고대는 경치도 후련하거니와 운치가 있다.
내려오던 길에 고대(高臺)를 들렀다. 쌍계사를 지나 불일폭포와 국사암 갈림길에서 불일폭포 가는 방향으로 100m 쯤 가다 보면 모퉁이를 돌아가는 왼쪽 산등성이를 치받아 올라가는 희미한 샛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길을 오르면 거대한 소나무 몇 그루에 둘러싸인 고졸한 승탑 한 기가 보인다. 보물 제380호로 지정된 이 승탑은 진감선사의 묘탑으로 보기도 하는데 조형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 고대에 서면 경치가 후련하고 그 분위기가 그윽하여 불일폭포를 찾게 되면 꼭 한 번씩은 들르게 된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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