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고향은 풍성했다!
추석날 아침, 고향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세 번의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고향이라고 해서 온전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매년 그랬던 것처럼 고향에는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아침이슬이 유독 많은 요즈음... 누렇게 익어가는 벼에도,
이제 꽃을 접으려는 무궁화에도 아침이슬이 듬뿍 내렸다.
이웃동네 아저씨는 아침 일찍 마실 나가고,
들판에는 오늘도 벼가 부지런히 익어가고 있다.
고개 숙이는 건 비단 벼뿐만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익어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겸손을 일찍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작은어머니가 심은 메밀도 하얗게 꽃을 피웠다. 일찍 수확한 메밀은 이날 작은어머니가 메밀묵을 만들어 우리에게 맛을 보여주었다. 무맛! 메밀의 맛은 무맛이다. 그래서 매번 입맛이 더 당기나보다!
햇살을 가득 받은 꽃은 이슬을 걷어내고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아침햇살에 비친 꽃은 더욱 생명력 있고 탐스럽다. 그의 이름은 나팔꽃이다.
지난 태풍으로 고향에도 피해가 컸다. 집 앞을 흐르는 개울이 넘쳐 논을 덮쳤다. 논은 전부 모래밭이 되었고 개울가의 논둑도 무너졌다. 덕분에 개울은 넓어졌지만....
둘째 형이 집 앞 개울의 예전 보가 있던 자리에 징검다리를 쌓기 시작했다. 태풍으로 물의 흐름이 너무 빨라 주변 언덕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큼직한 돌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모양. 이럴 때는 우월한 유전자를 자랑하는 조카가 제격이다. 커다란 돌을 장난감 다루듯 조카는 금세 돌을 옮긴다.
오후 내내 징검다리를 쌓더니 저녁 무렵에야 완성되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개울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징검다리는 놀이터가 되었다. 콘크리트 보와는 달리 돌 틈으로 물과 물고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이 징검다리 겸 보를 마을에선 '반지보'라 했다.
구경나온 다른 식구들은 길 위에서 빈둥거린다. 징검다리에서 놀던 아이들도 이젠 심심해진 모양이다. 그랬다. 심심하고 빈둥거리는 삶이야말로 참된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쁘고 계획성 있는 생활에 우리가 너무 익숙한 건 아닐까.
가을이면 황금으로 익어가는 벼도 매일매일은 심심하다.
굵직한 하얀 무도 매일매일은 심심하다.
알이 빼곡한 옥수수도 매일매일은 심심하다.
그 매일매일의 빈둥거리거나 심심함이 나중에 결실을 맺는다.
감도,
밤도,
제피(초피)도... 열매를 맺기까지 매일매일은 심심했다.
지난 태풍에도
깊은 산 속의 숲은 끄떡없었다.
할아버지 산소를 찾은 아이들은
비료 포대 하나 들고 미끄럼을 탄다. 도시에선 이 심심한 놀이가 이곳에서 꽤 재밌는 놀이가 된다.
무덤은 이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빙그레 웃으며 나타날 것만 같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이야기가 있는 여행 > 또 하나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자에서 초간편 대나무 포크 만들기 (11) | 2013.05.01 |
---|---|
아버지의 시계 (11) | 2013.03.01 |
일밤 <아빠 어디가> 자문 요청, 어떡할까요? (22) | 2013.02.23 |
국보급 폰을 버린 아내, 변절인가 변신인가? (8) | 2013.01.09 |
블로거가 꼭 알아야 할 출판계약 7가지 (21) | 2012.11.30 |
벼랑에 선 블로거, 하늘의 땅 모산재 풍경을 담다 (33) | 2012.09.18 |
블로그 스킨, 고수님들! 도와주세요 (14) | 2012.08.25 |
자전거 풍경, 이 정도면 멋지지 않나요? (17) | 2012.08.11 |
놀라운 작품으로 변신한 지리산 산간마을 안내도 (10) | 2012.07.02 |
금주 3개월, 동네 통닭집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사연 (14) | 2012.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