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시계-김천령의 시간여행 2>
3일 만에 햇빛을 본 나는, 어지러웠다. 시커멓던 공간이 점점 하얘지면서 늙수레한 노인 두 분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와 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입술을 앙다문 채였고 아버지는 연신 시계만 만지작거렸다.
10분간 주어진 면회는 금방 끝이 났다. “남자가 너무 고집이 세도 고생이야. 마음이 상해도 굽힐 때는 굽혀야 지 한 몸이 편한 겨.”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어머니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자리를 뜨면서도 아무 말 없이 문으로 향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지가 옳다 생각하모 절대 굽혀선 안 돼. 거기 남자라. 지 살자고 굽히는 건 남자가 아니라.” 투박하지만 단호한 아버지의 말에 수사관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부모님과의 면회로 나를 회유하려던 수사관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나는 ‘○○수산’이라고 위장을 한 지하실에서 고문의 두려움에 떨며 10일을 보냈다. 이후 계룡산으로, 여주 장호원에서 다시 안동으로 햇수로 3년을 보낸 후 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3년을 버티게 했던 힘은 갈라진 손등에 채워진 아버지의 과묵한 시계였다.
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평생 자식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던, 너무나 과묵했던 아버지였다. 큰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이 되었고, 삶의 무게는 당신의 입을 다물게 했다.
과묵했던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말대꾸를 했던 사람이 나였다. 아버지 지게를 타 본 유일한 자식도 나였다. 그런 만큼 기대도 가장 컸다. 형 셋은 사범대를 나왔으니 너만은 법대를 가야한다던 아버지, 늘 1등을 하면서도 그게 부담스러워 철없는 아이는 한동안 지리산에 숨어 버렸다. 그 후 성적이 바닥났던 난 지역의 한 대학에 입학했고 아버진 친척들에게 나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뒤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로는 학생회장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는 나에 대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회갑 때 자식들은 시계를 사드렸다. 번쩍번쩍 빛나는 도금시계였다. 과묵한 아버지는 선물에 태연했으나 세수할 때도 시계를 벗지 않았다. 목욕탕에서도, 심지어 병원에서 수술이 끝나고 나서도 제일 먼저 시계를 챙겼다.
그런 아버지가 20년 넘게 앓아온 지병과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고, 몇 번의 수술에도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6개월이 넘는 긴 병원 생활 동안 아버지는 늘 머리맡에 시계를 두었다. 중환자실에서 잠시 나왔을 때에도 시계를 먼저 챙겼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에도 제일 먼저 시계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몸을 닦아주고 나면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손목을 힘없이 내밀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면 우린 아버지의 손목에 얼른 시계를 채워주곤 했다. 그러나 병원 생활이 달을 넘기면서 더 이상 손목에 시계를 채울 수 없었다. 시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살이 짓물렀기 때문이었다.
시계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애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돌아가시던 날도 그랬고, 발인하던 날도, 아버지의 시계는 나의 호주머니에 꼭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후 그 시계를 묘소 앞 상석 아래에 넣어 두었다. 매번 산소를 갈 때마다 시계가 잘 있는지 확인을 하곤 했다. 시계가 잘 있다는 건 아버지가 편히 잠들고 계신다는 거였고, 행여나 시계가 없으면 아버지의 혼이 어디론가 사라진 게 아닌가 여겨 황망해 하며 묘소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결국 어떻게든 시계를 찾아내어 상석 아래 다시 고이 넣어 두곤 했다.
지난 설날에도 아버지의 시계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상석 아래에서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계는 심한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닮은 아버지의 솥뚜껑 같은 손에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등뼈가 휘도록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이 땅 농부의 숙명처럼 당신은 평생 자신이 일군 땅에 시계와 함께 잠들었다. 오늘 다시 고향에 간다. 아버지의 시계는 여전히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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