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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길

열 번을 가도 절로 즐거워지는 직소폭포 가는 길

 

 

 

 

열 번을 가도 절로 즐거워지는 직소폭포 가는 길

 

옛 선인들은 ‘걷는 것은 맑은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저 걷기만 해도 맑은 즐거움이 있는데 열 번을 가도 그 즐거움에 어쩔 줄을 모르는 곳이 있다. 이제는 제법 알려져 예전의 한갓짐은 없지만 그래도 그 길 위에는 늘 맑고 향기로운 즐거움이 있다.

 

 

모처럼의 장거리여행. 힘들고, 지치고, 아팠다. 3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변산은 변함이 없는데 나의 몸만 답답하다.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던 병이 나에게 득달같이 닥쳐와서 이제 새 삶을 살라고 다그친다.

 

내변산탐방지원센터도 많이 바뀌었다. 말끔히 정리된 주차장을 보자 ‘이젠 많은 사람들이 찾나 보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차비는 5,000원, 비쌌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없어진 대신 주차비가 인상되었나?

 

 

여행자는 이곳 변산을 수십 번 찾았었다. 줄포, 왕포, 작당, 모항 등의 아기자기한 포구들, 격포의 채석강․적벽강과 곰소의 염전을 어우르는 환상적인 해안선을 가진 외변산과 높지는 않아도 기묘한 암봉과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 내소사․개암사 등의 유서 깊은 사찰을 품은 내변산을 너무나 사랑해서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명승지로 손꼽혀온 변산은 조선8경 또는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로 여겨졌다.

 

직소폭포 가는 길은 요즈음 들어 젊은 연인들이 유독 많이 찾는 길이 되었다

 

변산을 찾을 때면 늘 버릇처럼 직소폭포를 가게 된다. 내소사는 이미 넘쳐나는 인파로 예전의 고요함을 잃은 지 오래여서 한동안 찾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절 초입까지 갔다가 밀린 차량에 기겁을 하여 차를 돌렸다. 그러나 직소폭포는 그 너른 품으로 늘어난 인파를 말없이 품고 있어 별 거리낌 없이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직소폭포까지는 2.2km, 왕복 4.4km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쉬이 다녀올 수 있는 평탄한 길이다. 허기야 시간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바람과 노닐다 보니 이날 해가 다진 후에야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그 길의 풍광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선인봉, 실상사 터, 봉래구곡, 산정호수, 선녀탕, 분옥담 등 폭포로 가는 길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는 비경의 연속이다. 이 산길이 다소 짧다고 여겨진다면 재백이 고개를 넘어 내소사로 가거나 월명암을 올라 남여치까지 이르는 길을 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상사지 인근의 보리밭

 

선인봉 아래 실상사지가 보인다. 깊은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른 터에 옛 절 실상사는 흔적만 남기고 주변에 새로이 절집이 섰다. 신라시대에 세워진 이 절은 원래 실상, 내소, 선계, 청림 등 변산의 4대 사찰 중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절터만 남았다. 가을에 억새가 피어나면 이 너른 평원의 절터는 더욱 그윽해진다.

 

 

잠시 햇빛에 드러났던 길은 이내 숲으로 사그라진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도 잠시, 청량한 바람 한줄기가 온몸을 씻어낸다. 바람 한줄기 따라간 아이는 계곡에 있었다. 손수건을 적셔 이마의 땀을 훔쳐낼 모양이다.

 

봉래구곡 바위글씨

 

이 계곡은 직소폭포 위까지 이어진다. 옛 사람들은 이곳을 일러 ‘봉래구곡’ 이라 했다. 예전 변산을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으로도 불렀다고 하니 그 풍광이 금강산에 못지않은 선계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선대 신선샘에서 발원한 계류가 제1곡 대소, 제2곡 직소폭포, 제3곡 분옥담, 제4곡 선녀탕, 제5곡 봉래곡, 제6곡 영지, 제7곡 금강소, 제8곡 백천을 거쳐 제9곡 암지까지 아홉 곡의 명승을 2㎞에 걸쳐 흐르는데 이를 ‘봉래구곡’이라 하였다. 그 중 봉래곡의 넓은 바위 위에 봉래구곡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아홉 곡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계곡 너럭바위에는 ‘소금강’과 함께 ‘봉래구곡’이라는 글씨가 온전히 남아 있다.

 

 

잠시 너럭바위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이때 누군가 물수제비를 떴다. 점점 퍼지는 물수제비 아래로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모여 들었다. 물의 파장을 따라 화살처럼 일제히 달려드는 물고기에 산중의 고요는 깨지는가 싶더니 이내 고요해진다.

 

 

허리를 세워 계곡을 빠져 나오니 산딸나무와 때죽나무가 하얀 꽃을 피웠다. 위로 당당히 핀 산딸꽃과 달리 아래에 매달린 때죽꽃은 힘에 부쳐 꽃잎 몇 장을 계류 암반에 떨쳐 냈다. 검은 암반에 흰 그림자가 한 점 한 점 그려졌다.

 

 

길은 어느새 비탈이다. 그래봤자 야트막한 언덕 하나쯤 오르는 수준이다. 자연보호헌장탑이 나온 걸로 보니 벌써 1.3km나 왔다. 걸었다는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절반을 넘게 걸어온 셈이다. 이곳에서 오른쪽 산길을 택하면 월명암 가는 길이다.

 

산정호수

 

‘휴~우’. 길게 숨을 내쉬는데 눈앞에 산정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열 번을 넘게 이곳을 다녀가서 이쯤이면 산정호수가 나타난다는 걸 진즉 알고 있음에도 매번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물 위를 걷다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암반에는 이미 사람들 몇몇이 차지하였다. 암반 아래는 낭떠러지, 짙푸른 호수가 모든 것을 빨아드릴 태세다. 나무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인 그들은 느긋하게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래 호수 옆으로 난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치 물 위를 걷는 듯하다.

 

산정호수를 따라 폭포를 가는 산길이 놓여 있다

 

호수와 나란히 걷는다는 것, 사랑하는 애인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이 호숫가 길에선 많은 연인들을 볼 수 있다. 한쪽 옆구리에는 애인을 끼고, 다른 쪽 옆구리에는 호수를 끼고... 어찌 보면 둘 다 사랑하는 데칼코마니의 한 모습일 것이다.

 

데칼코마니

 

하나였던 변산이 둘이다. 호수 위의 변산과 호수 아래의 변산. 변산의 아름다움을 모두 표현하기 어려워 그 속살까지 보여주고 싶었음이랴. 그 옛날 무릉을 찾은 신선들은 물 위를 걸어 혹은 물 아래를 걸어 선계로 들어갔으리라.

 

 

이상도 하다. 호수를 벗어나 산길을 올라 선녀탕 가까이 왔는데도 폭포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쯤이면 우레와 같은 폭포소리가 숲을 뚫고 들려와야하는데...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 천양희, <직소포에 들다>

 

선녀탕

 

 

그래도 들리지 않는다. 숲을 빠져나오니 하늘이 바로 눈앞이다. 그래도 아직 이다. 눈을 떴다.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앞에 보이는 건 직소폭포인데, 하얀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산을 깨울 어떤 폭포소리도, 계곡을 일으킬 어떤 폭포수도 보이지 않는다.

 

열 번을 넘게 직소폭포를 왔지만 이렇게 메마른 모습은 처음이다

 

 

생산을 멈춘 여자의 그것처럼 폭포는 메말라 있었다. 긴 가뭄의 끝, 그래도 포기는 않는다. 가는 물줄기라도 쉼 없이 흘러 보내 아래 소에 차곡차곡 모아둔다. 늘 꿈꾸어오던 세상을 위해...

 

분옥담

 

분옥담은 말 그대로 옥빛이다. 물이 마른 지금도 깊은 수심과 옥을 풀은 듯한 물빛이 놀랍다. 전망대를 내려와 폭포로 향했다. 폭포 아래는 깊은 소, 바위에 걸터앉았다. 탁족이라도 하고 싶건만 이곳은 상수원 보호구역이다. 양말만 벗고 바위에 기대어 바람에 발을 씻었다.

 

 

...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 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천양희, <직소포에 들다>

 

 

▒ 예부터 변산을 일러『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산이 겹겹이 쌓여 높고 깎아지른 듯하며 바위와 골이 그윽하다.”고 하였다. 『택리지』에도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라고 묘사하고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았다. 그중 직소폭포는 ‘실상용추’라 불리며 높이 22.5m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변산8경 중의 하나이다.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직소폭포까지는 2.2km, 왕복 4.4km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이 산길이 다소 짧다고 여겨진다면 재백이 고개를 넘어 내소사로 가거나 월명암을 올라 남여치까지 이르는 길을 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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