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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길

시골버스 타고 혼자 떠난 지리산 골짜기

 

 

 

시골버스 타고 혼자 떠난 지리산 골짜기

 

"나는 집에 있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나의 삶을 보내야 할 곳 가운데 지구상에서 이보다 나쁜 곳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오후 1시 30분, 진주시외버스터미널. 퇴원 후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직 운전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아내의 충고로 버스를 탔다. 버스로 한 시간을 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숲길을 고민하던 끝에 선택한 곳은 대원사 계곡. 시골버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지만 모처럼의 여행에 들뜬 마음은 모든 것을 쉬이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운전사와 시골버스 승객은 모두 세 명.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중년의 등산객 한 명, 두서너 개의 보자기 짐 뭉치로 보아 아들네에 다녀오신 듯한 시골 할머니, 그리고 여행자가 승객의 전부였다. 단성, 남사, 시천을 지나면서 골짜기는 점점 좁아지는가 싶더니 덕산에 이르러 시야가 탁 트인다. 길은 다시 좁아지고 산 아래 깊숙한 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던 버스는 어느덧 종점인 대원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는 느릿느릿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대원사 계곡 길은 평촌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대원사, 유평, 중땀, 새재까지의 약 8km 정도로, 찻길이 나 있어 그다지 힘든 다리품은 아니다.

 

첫발은 딱딱한 포장길에서 시작되었다. 흙길이면 좋으련만, 하던 마음도 하늘을 가린 울창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이내 사그라진다. 협곡 아래를 흐르는 계곡 물소리도 우렁차다. 평일이어서 오가는 이들은 거의 없다. 간혹 노인 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조용히 길을 오르내릴 뿐이다. 그러나 주말이면 차들로 인해 이런 한가로움은 상상할 수 없다.

 

 

계곡 좌우로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첩첩 포개진 산자락, 울창한 숲, 집채만 한 바위 사이로 흐르는 흰 물줄기가 강렬하다. 싱그러운 초록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열다 어느새 귀를, 코를, 나중에는 입마저 벌리게 되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길은 계곡을 아래에 두고 산허리를 구불구불 돌아간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가 싶으면 이내 그늘이 가려 주고 계곡 물소리가 단조롭다 여겨지면 새소리가 중간 중간 화음을 넣는다.

 

 

‘국립공원 구역’이라고 새긴 바위에 잠시 눈을 내어주고 대원교를 건너면 계곡은 넓어진다. 예전 이 일대는 노영호 부대와 이영회 부대 등 경남도당 소속의 빨치산들이 활동했던 주요 근거지 중의 하나로 ‘노루목 사건’이라 하여 이곳 협곡에서 군경들이 포위당해 많은 희생을 치른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98년 여름에는 기습 폭우로 불과 서너 시간 만에 이곳 골짜기에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던 아픔이 있었다.

 

 

대원사 일주문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였다. 계곡으로 내려가 그늘 진 바위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비탈길을 걸어서인지 몸은 이미 땀범벅이 되었다. 양말을 벗고 계곡에 발을 담갔다. ‘어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거의 본능적으로 재빨리 발을 뺐다. 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시 발을 담갔다. 그러곤 아내가 싸준 간식을 꺼내 나만의 식탁을 차렸다.

 

 

일주문을 지나니 숲은 더욱 울울창창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시커먼 나무줄기, 초록빛의 잎들이 촘촘하게 얽혀 하늘을 가려버렸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참나무와 소나무들. 고개를 젖히고 가지 끝을 따라 빙빙 돌던 눈이 순간 밝아졌다.

 

 

대원사. 계곡에 바짝 붙어 자리한 이 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거대한 전나무와 바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였다. 분홍빛 철쭉이 핀 절집은 마치 액자 속에 든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바위와 나무, 철쭉과 누각, 샘물과 돌길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울산 석남사와 예산 수덕사의 견성암과 더불어 비구니 사찰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것을 법일 스님이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불교계의 큰스님 성철 스님이 처음 불가에 발을 들여놓은 곳이기도 하다.

 

 

비구니 도량답게 정갈한 절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김원주 화가가 후배와 함께 찾아왔다. 처음 병을 알았을 때 그는 많이 놀란 눈치였고 마침 며칠 전 청학동 삼성궁에 내려와 작업을 마무리하고 오늘 떠나던 터였다. 대원사에 요양삼아 왔다고 하니 이리로 냉큼 쫓아 온 것이었다.

 

 

혹시 무리라도 될까 싶어 후배에게 차로 뒤따르게 하고 둘이서 숲길을 걸었다. 괜찮다고 해도 한사코 후배를 뒤따르게 했다. 후배도 넓은 마음으로 엷은 미소를 띠며 차로 뒤따랐다. 일단 유평 마을까지 걷기로 했다. 일행은 이호신 화가가 그린 마을 안내도의 기발함에 찬사를 보내며 천천히 걸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오를수록 계곡은 오히려 점점 넓어진다. 붉은 암반 위로 맑디맑은 옥류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내린다. 멋스럽게 늘어진 노송 가지와 금방이라도 붉어질 것만 같은 단풍나무가 예스럽기조차 하다. 옛날 지리산 심마니들이 이곳 깊은 소에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입산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일러 ‘세심탕‘세신탕’이라고 부른다. 대원사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이다.

 

 

마을이 나왔다. 유평 마을이다. 이곳을 다녀간 지도 10년이 넘었으니 많이도 바뀌었다. 이름도 예뻤던 ‘가랑잎초등학교’ 없어진 줄 진즉 알았지만 교문에 새겨졌던 교명마저 없어져 버려 아쉬움이 컸다.

 

원래 이름은 '유평초등학교(삼장국민학교 유평분교)'로 1970년대 이곳에 취재를 나왔던 기자가 ‘가랑잎초등학교’라는 정감어린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매년 가을이면 산골 오지의 이 학교 운동장이 낙엽들에 뒤덮여 등교한 학생들이 낙엽을 치우기 바빴다는 사연에서 유래했다. 학교는 1994년에 결국 폐교되었다.

 

교정을 조용히 거닐었다. 건물 뒤로는 넓은 계곡이 학교를 휘감아 흐르고 있다. 아주 앙증맞기조차 한 산골학교는 지금 청소년 수련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운동장 한구석에 모아놓은 교적비와 사자상, 충효라고 붉게 새겨진 석상이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전부였다.

 

 

▒ 이곳 대원사 계곡에서 지리산 주능선 코스인 ‘대원사 코스’가 시작된다. ‘대원사 코스’는 주능선 종주의 시작 혹은 마무리 코스로 사실 쾌나 힘든 코스 중의 하나이다. 여행자는 유평 마을까지 3.4km 정도를 걸었다. 전체 계곡 길은 8km로 (윗)새재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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