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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박물관

바람의 예술가, 제주 오름에 눕다-두모악 김영갑갤러리


 

바람의 예술가, 제주 오름에 눕다-두모악 김영갑갤러리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어서 편안하고 즐겁다. 두 눈으로 보았고, 두 귀로 들었고, 두 손으로 만져 보고, 두 개의 콧구멍으로 맡아 보고, 온몸으로 느껴보았기에 확신했던 것들이 진짜배기가 아니라 허드레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20년 동안 오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두 개, 세 개 욕심을 부렸다. 중산간 오름 모두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는 조급함에 허둥대었다. 침대에 누워 지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같은 과오를 범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여행자는 울 수밖에 없었다. 제주 중산간의 끝 두모악에서 만난 바람의 예술가 김영갑은 끝내 여행자를 울리고 말았다. 그에 대한 짙은 그리움보다 10년 여행에 우쭐대었던 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영갑은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작업을 하던 중 제주에 홀려 1985년 아예 섬에 정착하였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신내림 받은 무녀처럼 섬을 헤집고 다니며 제주의 얼과 속살을 카메라로 받아 적었다. 이때부터 그는 열병을 앓는 이처럼 제주와 지독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사진으로 찍지 않은 것은 제주도에 없는 것이라는 말처럼 제주도에 김영갑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사진에 미쳐 홀로 돌아다니던 댕기머리를 한 그를 보고 사람들은 간첩으로 오인하여 경찰에 신고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가수로 착각해 사인 종이를 내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그의 제주 사진은 15년 동안 2만 컷이 되었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없이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면 외로움과 궁핍함은 감수해야 한다. 외로움과 궁핍함을 즐기려면 무언가 소일거리가 있어야 한다. (...) 간장, 된장, 고추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하루가 상큼하다. (...) 자연에 묻혀 지내는 한 돈 걱정은 없다. 문제는 소일거리다. 365일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소일거리만 있으면 된다. 제주도의 속살을 엿보겠다고 동서남북 10년 세월을 떠돌았다. 그러고 나니 제주도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아름다움의 핵심에 도달하는 황홀한 순간들을 상상하고 그것을 사진에 담아내었다.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기 위해 스물네 시간 그는 늘 깨어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광풍과도 같은 루게릭병이 엄습해 왔다. 창고에 켜켜이 쌓인 사진들을 위한 갤러리를 마련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구하여 작업을 하던 중 그는 손이 떨리기 시작하였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이 왔다.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어느 날 나에게 광풍과도 같은 루게릭이 엄습해 왔다. 루게릭 진단을 받기 전까지 나는 그런 병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 불치병이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용감한 투사였다. 훈장은 받지 못했어도,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 최선을 다해 부끄러움 없이 싸웠다. 사람들의 주목은 받지 못했어도, 스스로에게 용감했었노라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길어야 2~3년 이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겁을 먹었다. 두려움에 놀라 당당함은 안개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 나의 당당함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에겐 내일은 없었고 오직 오늘밖에 없었다. 그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그의 방식대로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걸어갔다.

 

그는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몸을 움직여 사진 갤러리 만들기에 열중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는 폐교였던 삼달분교를 개조하여 2002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육신의 움직임이 둔해질수록 활동 반경이 좁아져 방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손의 움직임이 약해져 책장을 넘기거나 글을 쓸 수도 없다.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에 부친 날은 사람들과 만날 수도 없다. 혀가 꼬여서 어눌해진 발음 때문에 전화통화도 어렵다. 혼자 지내는 하루는 느리고, 지루하다. 일상은 단순하고 탄력이 없다. 방안에서 지내는 동안 침대에 누워 있는다. 눈을 뜨면 천정과 벽만 보인다. 장애를 가진 내 육신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인다. 중산간 외딴집에서의 하루는 길었다. 찾는 이 없이 혼자 지내는 하루는 지루하고 더디 흘렀다. (...) 불평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이 지금은 그립다. 온종일 침대에서 지내야 하는 지금은, 카메라를 들고 들녘을 쏘아 다니던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깨닫는다.>


 

유채꽃이 질 무렵 혀의 근육도 굳어졌다.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욕심 부릴 수 없게 되니까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고, 나머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철들면 죽는 게 인생, 여한 없다. 원 없이 사진 찍었고, 남김없이 치열하게 살았다.”


 

2005년 5월 29일 투병 생활을 한지 6년 만에 그는 고이 잠들었다. 그의 뼈는 두모악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작은 카메라 하나 들고 들녘으로, 바다로, 구름 따라 흐르기 위해 그는 오늘도 갤러리 마당을 매일 걷는다. 20년 동안 그는 오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오름은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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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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