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현실에서 과거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한 풍경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⑤-5, 구마모토 성
▲ 니노마루 광장에서 본 대소천수각과 우토야구라(중앙)
성을 벗어나기로 했다. 우토야구라를 관람하고 나왔을 때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성 안에는 마땅히 식사할 곳이 없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성 밖에 사쿠라노코지라는 음식점 단지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통편을 알아보니 마침 아래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었다. 버스는 호아테고몬에서 식당이 있는 조사이엔을 7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안내소에 있는 안내원에게 버스 타는 곳을 묻자 처음엔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이내 따라오라며 손짓하더니 버스가 있는 곳까지 앞서 걸어갔다. 역시 친절한 일본인이다.
▲ 23개의 특징 있는 음식점과 기념품 매장이 있는 사쿠라노코지
성의 심장부 혼마루를 지켜라
마을에서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성으로 돌아왔다.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그냥 지나쳤던 호아테고몬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으로 오후 답사를 이어갔다. 오전의 여행이 구마모토 성의 핵심 구역들을 관람한 것이라면 오후에는 핵심 구역에서 외곽으로 빠져나오면서 성의 구조를 다시 한 번 살피는 것이다.
▲ 구마모토 성의 정문 격인 호아테고몬
앞서 이야기했지만 일본 성은 천수각을 중심으로 이중삼중으로 겹겹 에워싸는 방식이다. 천수각이 있는 성의 중심부가 첫 번째 성곽인 혼마루(本丸)이고, 그 혼마루를 에워싼 두 번째 성곽이 니노마루(二の丸)이고, 니노마루를 다시 에워싼 세 번째 성곽이 산노마루(三の丸)이다. 이들 구역의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 성의 심장부인 혼마루를 방위하는 것이다.
▲ ▼ 안쪽에서 본 니시데마루의 성벽은 얼핏 전쟁을 위한 성벽이라기보다는 무슨 전시관의 담장처럼 평화로우면서도 선적인 매력이 있다.
구마모토 성은 혼마루를 성곽의 한쪽 구석에 배치한 제곽식 구조이다. 대개 일본의 성에는 혼마루 방어를 위한 니노마루에도 어전이라 불리는 거주공간과 정원을 두기도 한다. 산노마루에는 무사 저택을 배치한다. 구마모토 성에서는 혼마루에는 어전이 있으나 니노마루에선 그 흔적을 볼 수 없었다. 다만, 산노마루 구역에 호소카와 교부 사무라이 저택이 있었다.
▲ 구마모토 성의 현관에 해당하는 니시오테야구라몬은 가장 격식 있는 성루 문으로 꼽힌다.
구마모토 성은 서쪽을 바라보고 동쪽을 등지고 있다. 그래서 서쪽에 있는 호아테고몬이 정문이고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성벽도 서쪽에 주로 둘러쳐 있다. 대신 동쪽은 높은 성벽과 해자에 둘러싸고 야구라(망루)를 밀집시켜 철벽 방어를 했다. 천수각에서 우토야구라, 호아테 고몬, 니시오테야구라몬 등을 지나다 보면 성벽으로 겹겹 둘러싸인 철옹성 구마모토 성을 실감하게 된다.
▲ 안쪽과는 달리 바깥에서 보는 니시데마루의 성벽은 깊이 파인 해자 너머로 높이 솟아 있다.
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호아테고몬을 나오면 니시데마루이다. 건물이라고는 없이 드넓은 잔디광장 끝으로 멀리 성벽이 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니시데마루의 성벽은 얼핏 전쟁을 위한 성벽이라기보다는 무슨 전시관의 담장처럼 평화로우면서도 선적인 매력이 있다. 그 끝에 이누이야구라(서북쪽 망루)가 있다.
비정한 아름다움을 보다
니시오테야구라몬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온다. 성의 중심인 혼마루를 방위하는 니시데마루에는 서쪽(니시), 남쪽(미나미), 북쪽(기타)에 각기 세 개의 성루(야구라) 문(몬)이 있다. 니시오테야구라몬, 미나미오테야구라몬, 기타오테야구라몬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성의 현관에 해당하는 니시오테야구라몬이 가장 격식 있는 성루 문으로 꼽힌다.
니시오테야구라몬을 나오면 니노마루 광장이다. 이곳에선 여태껏 본 구마모토 성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깊게 파인 해자 너머로 초록의 잔디가 양탄자처럼 짙게 깔려 있고, 그 위로 회색빛의 높은 성벽이 길게 뻗어 있다. 초록의 잔디와 파란 하늘은 원색에 가까운데 성벽과 성루는 흑백의 필름 같다. 갑자기 현실에서 과거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화려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은 잠시 잊어버리고 담백했던 과거의 삶이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 두 번째 성곽인 니노마루는 지금은 잔디가 깔린 넓은 광장으로 변했다.
잿빛의 성벽 위로 불쑥 솟은 은빛의 대소천수각과 우토야구라는 상상 속의 성인 양 아득하고 아련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비정하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무사의 냉랭한 기운이 느껴진다.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니 그 냉혹함조차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보이겠지만 그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지경이다. 극도로 절제된 미, 금방이라도 할복할 것 같은 넘치는 긴장미에 마냥 아름답다고만 할 수 없을 듯싶다.
▲▼ 해자 너머로 보이는 니시데마루의 서북쪽 망루 이누이야구라
이 절제되고 검박하고 냉혹하기까지 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어 갔을까, 하는 연민이 저 밑에서부터 생긴다. 높은 성벽 안에서 화려함을 누린 자와 깊은 해자에 슬픔을 묻은 자, 분명 둘의 아름다움은 다를 것이다. 비정한 아름다움과 두려운 아름다움….
지슈칸 터를 지나니 광장 끝으로 성터가 얼핏 보인다. 니노마루 고몬 터이다. 폐허가 된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에는 성곽의 흔적만 일부 보일 뿐이다. 난공불락이라는 것도 인간의 언어일 뿐, 자연 앞에서는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그 어마어마한 넓이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구마모토현립미술관을 지나 성을 나온다. 고코쿠 신사가 있다. 여기서도 옛 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 니노마루 광장을 산책하는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들.
길은 두 갈래이다. 옛 호소카와 교부 저택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호소카와 교부 저택은 산노마루 구역에 있다. 성의 가장 바깥쪽으로 무사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은 그 산노마루 사무라이의 집이다.
▲ 니노마루 광장 끝으로 보이는 니노마루 고몬 터. 이 성문을 나가면 세 번째 성곽이었던 산노마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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