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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네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 생가를 가다

 

조선의 마지막 의로운 선비. 이건창․김택영과 더불어 ‘한말3재’로 불렸고, 문장가이자 시인․역사가로서 말기적 증세에 허덕이는 조선왕조를 통렬히 비판했던 꿋꿋한 선비, 1910년 한일강제병합 소식에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을 광양에서 제일 먼저 뵙기로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광양 땅을 밟는 여행자에게 꼭 거쳐야 하는 일종의 신고식인 셈이었다.

 

 

광양 읍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광양역에서 택시를 불렀다. 요금은 6900원, 기차요금보다 더 많이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택시기사도 매천 생가를 택시로 가본 적은 없다며 요금이 일만 원은 나오지 않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이다.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광양역을 떠난 택시는 멀리 읍내를 둘러싼 백운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사이로 난 농로 같은 도로를 얼마간 달리자 다리 너머로 읍내가 나타났다. 광양불고기거리가 쭉 펼쳐지는 소읍을 서천과 동천이 좌우로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니 햇살 넘치는 산자락에 안긴 작은 마을이 나왔다. 능선에 꽂힌 두 기의 철탑만 아니었다면 한없이 포근했을 마을 입구에 매천 황현 선생의 생가와 묘소를 알리는 갈색 푯말이 어지러운 전선줄 사이로 보였다.

 

 

마을 안쪽 골목길로 접어들자 중간쯤에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매천 황현 선생(1855~1910)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2002년에 광양시에서 지었다. 문간채를 들어서니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초가집이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초가집과 대문채, 뒤뜰의 작은 초정이 전부였다. 그나마 옆에 바로 민가가 붙어 있어 공간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기둥의 주련에는 그의 시가 적혀 있었는데 대강 옮겨보면 이러하다.

“산속에 삼십년 묻혀 살면서/ 덕을 키웠을 뿐 나무를 키우진 않았다네/

감나무며 밤나무들은 저절로 자라나서/ 주렁주렁 가을 열매가 가득 열린다네”

 

 

안채 마루 벽에는 그의 ‘절명시’와 함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검게 칠한 목판에 붉게 새긴 글씨를 보니 절로 숙연해진다.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대목에 이르면 당시 그의 고뇌와 결기가 심장을 후벼온다. 검소하지만 단아한 그의 초상에는 고고한 선비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매천 선생은 황희 정승의 15대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시문에 능하여 천재로 불리었다. 29세(고종 25, 1883년)에 특설보거과에 급제, 34세(1888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조정의 부패를 안타까이 여겨 낙향했다. 세속의 미련을 버린 매천은 서재 구안실을 마련하고 이후 구례로 옮겨가 호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진양성과 학문에 몰두했다.

 

 

1910년 8월, 나라를 잃자 망국의 한을 닮은 ‘절명시’ 4수와 자제들에게 ‘유자제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몇 번이나 죽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대목에선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묻어나고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다’는 대목에 이르면 절로 숙연해진다. 생의 끝이 윤곡처럼 자결할 뿐, 진동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부끄럽다는 지조 높은 선비의 자책에선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는 죽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 왔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지고 죽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아니한가” 하는 말로 장렬한 삶을 마친 우국지사, 문․사․철을 한 몸에 갖추고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한 문장가, 당대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가, 나라의 운명을 따라 당당하게 목숨을 던진 지조 높은 선비... 그의 고결한 삶은 지식인의 본분이 무엇이며, 지식인의 위엄은 어떠해야 하며, 지식인은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지식인이 가야할 길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의 비장한 ‘절명시’의 한 구절을 보자.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사라졌구나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을 돌이켜보니

글을 아는 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생가에 들어섰을 때 안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느닷없이 사람이 나와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문화해설사였다. 주말에만 광양시 문화해설사들이 번갈아 근무한다고 했다.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매천 황현 선생과 망덕포구의 윤동주에 대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이 여겼다. 섬돌에 고무신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더니 옆집 할머니 신발이란다. 황현 선생의 후손인데 생가를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을 나와 묘소로 향했다. 골목 끝에 있는 우물에서 다시 마을을 돌아다보았다. 백운산의 문덕봉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예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오던 서석마을은 바람 한 점 없이 따스했다.

 

 

묘소와 사당이 있는 매천역사공원은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선생은 그가 태어난 백운산 문덕봉 아래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묘소 앞으로 붓과 책의 형상에 새긴 그의 일대기가 눈에 띄었다. 사당 못 미처 언덕에는 문병란 시인이 쓴 시비가 있다. 한참이나 정자에 우두커니 앉아 시대정신과 지식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매천황현생가와 매천역사공원은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에 있다. 매천역사공원은 생가에서 500m쯤 가면 된다. 매천 선생의 사상은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 <매천집>에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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