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집 기행

윤동주의 '서시', 이곳에 숨겨져 있었다.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

 

 

 

 

 

 

윤동주의 유고, 이곳에 숨겨져 있었다.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누구나 학창시절 한두 번은 읊조렸을 윤동주의 <서시>다. 그러나 <서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하마터면 우리는 이 시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며 윤동주가 어떤 시를 썼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드러난 건 어느 외진 포구에 숨겨진 원고 덕분이었다.

 

 

시인 윤동주. 그의 흔적을 만난 곳은 의외로 한적한 포구였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광양만 언저리에 있는 망덕포구, 그곳에서 시인 윤동주를 만났다. 이 한적한 포구도 봄에는 벚굴, 가을이면 전어로 유명세를 떨치며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바다 같이 넓은 섬진강 하구를 따라 길게 늘어선 포구를 걸었다. 눈앞에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남해수협중매인 70번’이라고 적힌 간판 아래 부원수산이라는 글자가 또렷했고 그 옆으로 남해횟집 주차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텅 빈 공터인데도 공장의 기계소리는 요란했다. 공터 옆 낡은 집 한 채가 오도카니 시간을 비켜 서 있었다.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숨겨두었던 정병옥 가옥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41호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이라고 적힌 명패만 아니었다면 포구에 있는 무슨 낡은 공장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낡은 양철지붕을 한 오래된 창틀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곤 눈을 댄 채 건물 안을 한동안 흘깃흘깃 훔쳐보다 건물 옆 묵직한 철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굳게 빗장을 지른 철문을 여니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가옥 안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폐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문화재라고 느낄 만한 것은 없었다. 일단 푸념은 뒤에 하기로 하고 바깥에서 보았던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을 먼저 찾았다.

 

 

이 가옥은 국문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1922~1982)의 옛 가옥이다. 1925년에 지은 이 가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없었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를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럼, 어째서 윤동주 시인의 유고가 이곳 외진 포구에 보존되었던 것일까.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필원고를 하숙집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맡기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윤동주는 3부의 자필원고를 만들어 한 권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2부를 은사였던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각각 맡겼다.

 

 윤동주 유고시집 보관 가옥(1962)

 

정병욱은 학병에 끌려가기 전 어머니에게 이 원고를 소중히 보관해줄 것을 당부하며 혹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하게 된다.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 모를 일제의 수색을 피해 마루 밑에 원고를 숨긴다. 그 와중에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윤동주 시인은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된다.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오른쪽)

 

마루 밑에 보관해 있던 원고는 해방을 맞아 정병욱이 다시 찾게 되고 시인의 유고는 1948년 정병욱과 그의 동생 윤일주에 의해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만약 유고가 이곳에 보존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널리 애송되는 그 유명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 시인의 대표작은 영원히 그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정병욱이 보관했던 윤동주 자선 육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표지

 

이 가옥은 정병욱의 부친이 지은 건물로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건물이다. 요즈음은 보기 힘든 1920년대 점포주택이다. 일제강점기 암흑기의 어두운 문학사를 밝힌 저항의 등불로 평가되는 시인의 유고를 보존했다는 문학사적인 의미도 크지만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또한 정병욱 교수가 이곳에서 판소리와 한글을 연구했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정병욱은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2007년 한 지역 언론이 보도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고 이 가옥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게 된다.

 

 

 

정병욱 가옥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문짝과 창문이 떨어져나가 흉가에 가까웠다는 예전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지만 마룻바닥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합판으로 얼기설기 짠 초라한 문짝하며, 너덜너덜한 빛바랜 벽지가 여간 볼썽사나운 게 아니다.

 

 

현재 이 가옥의 주인은 박춘식 씨다. 부친인 박영주 씨는 정병욱과 외종간이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정병욱의 동생 정덕희와 결혼했으니 박춘식 씨 또한 윤동주와 사돈지간이 된다. 이 가옥이 현재 사유재산인 관계로 보존과 유지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광양시에서 이 가옥을 매입하려 하고 있으나 소유주는 거부하고 있는 상태. 소유주와 광양시 사이의 여러 가지 의견 차이를 잘 해결하여 이곳 망덕포구가 윤동주의 고장임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먼지 수북이 쌓인 그늘진 마루 대신 마당 가운데 놓인 댓돌에 앉았다. 햇빛이 넘쳤다. 이따금 포구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이 양철문을 두드렸다. 문을 꼭 닫았다. 덩그러니 놓인 두어 개의 절구와 장독 너머로 누군가 텃밭을 가꾸었다. 수선화가 몇 송이 꽃을 피웠다. 노랗다. 담장 아래엔 붉은 동백이 검푸른 녹색의 잎 사이를 뚫고 피어났다. 도시락을 꺼냈다. 다시 건물을 훑어본다. 기둥의 오랜 옹이는 이 집이 백년 가까이 순탄치 않게 살아왔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정병욱 가옥은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포구에 있다.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되었다. 2012년 8월윤동주 시인의 가족은 이 육필원고와 시인의 유품 일체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