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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다

윤봉길의사 탄생 100주년에 찾은 도중도(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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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사적지를 찾은 날은 예산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애초 답사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말그대로 부담없는(?) 여행지 위주로 일정을 잡았다.
남연군묘 가는 길에 사적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빠듯한 일정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즈음이라 이후 시간에 따라 답사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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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당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윤의사가 네살 때부터 망명 직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남연군묘에서 내려오자 시간은 이미 4시가 넘었다.
무리한 여행 일정이라 다음을 기약하자고 일행들 모두 동의를 하였는데,
한 분이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던진 말에 우리 모두는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역사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이 어찌 매헌 사적지를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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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당 내부

건국 60주년을 맞아 근래에 말들이 많았었다.
건국 60주년 행사가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훼손하는 위헌이라는 제기와
상해임시정부는 국가의 요건을 갖추지 않은 망명정부의 선언에 불과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소란했었다.
크게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논리를 한낱 여행자가 평하는 것은 주제 넘은 일일 수도 있다.
다만,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단지 건국의 시점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조선의 멸망과 경술국치 이후, 임시정부를 위시한 끈질긴 우리 선조들의 항일 정신을
 건국의 정신적 초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시점에 대한 인식과 정통성은 이해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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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탄생 백주년에 충의사를 찾는 일은 분명 가슴 뿌듯한 일이다.
도로 왼편의 기념관을 뒤로 하고 저한당으로 향했다.

'저한당 '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윤봉길 의사가 직접 당호를 지어 붙인 이 옛집은
윤봉길 의사가 네살 때부터 1930년 봄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살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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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한 초가집은 너무도 깔끔이 정비되어 있다.
일정에 쫓기어 저한당만 관람하고 나가려다 도중도를 예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이리저리 찾아 보았다.
논 가운데에 유난히 숲이 우거진 곳이 있어 '도중도'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말그대로 도중도이니 작은 실개천을 건너야 한다.
시멘트 다리 위로 솟대가 어지러이 서 있는데다
어설픈 나무다리가 눈에 거슬린다.
이왕 복원을 할 바에야 제대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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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도島中島
두 물길이 만나서 배 모양의 작은 섬을 만들어 낸 곳으로 윤의사의 생가이다.
윤의사가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의 섬으로 일본군이 발을 들여놓지 못할 섬이라 하였다.
윤봉길의 증조부인 윤재가 정착한 땅으로 풍수가들은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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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도 수암산에서 보면 도중도가 섬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으나 아쉽게도 그러질 못했다.

윤의사는 순종 융희 2년인 1908년 6월 12일 이곳 도중도에서 태어났다.
글을 모르는 한 젊은이가 아버지의 무덤을 잃어버린 것을 보고
국민들이 무식하면 나라를 잃어버린다는 깨달음을 얻고 이후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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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좀 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1930년 3월 6일.
"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망명의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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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당 光顯堂 도중도 내에 있으며 윤의사가 태어난 집이다.

지금은 노신공원으로 불리는 홍구공원에서
1932년 4월 29일 거사를 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장개석은 "중국군 백만 대군이 못 하는 일을 해냈다"며
그의 충정과 용감한 행동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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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원 復興院 10세(1926년) 부터 23세(1930년) 까지 야학, 강연회를 하던 곳이다.


25세.
이 숫자에 나의 마음이 복잡해졋다.
장남으로 태어나 한 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한 평범한 청년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 수 있었던 정신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건국 60주년 행사에 대한 많은 논란이
논쟁을 위한 논쟁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신은 사라지고 이론과 정쟁만 난무하다.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역대 회장 등 간부로 정치인들이 포진되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념사업회를 활용하는 파렴치한 일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친일파의 후손이 독립투사 기념사업회 간부로 버젓이 활동하는
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다.

"기념사업회에 간판과 명함만 있고 기념사업은 실종했다"
는 홍범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오직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이 글이
오늘따라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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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65년 옛집 뒷뜰에 의거기념탑이 세워지고 1968년 말에는 의사의 존영을 모신 충의사가 창건되었다.
정부에서는 1972년에 윤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의사의 유족이 살고 있던 저한당과 도중도 일대를 사적 제299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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