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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다

하늘 아래 첫 동네 가는 불편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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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향기나는 지리산 산마을

숲이 하늘을 가린다는 산내를 찾았습니다. 그저 조용한 산골에 하릴없이 멍하니 있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산을 타기도 귀찮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봄날이었습니다. 초록빛으로 변해 가는 나무숲을 침대삼아 자고 싶은 꼭 그런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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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관광도로

반선마을에 이르니 도로변에 토종돼지를 장작에 구워 팔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이곳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7월 백중날 이 절의 주지스님이 신선대에 기도하러 올라간 뒤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주지스님이 신선이 된 줄 알았습니다. 그 후로 신선대로 기도하러 간 스님들이 하나같이 사라졌습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어느 대사가 기도하러 가는 스님의 옷자락에 독약을 묻혔습니다. 다음날 신선대에 가서 보니 이무기와 함께 스님의 주검이 있었습니다. 결국 스님들은 신선이 된 것이 아니라 이무기에게 잡혀 먹힌 것이었지요. 죽은 스님들을 기리기 위하여 반쯤 신선이 되었다고 하여 '반선'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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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은 기암절벽과 폭포와 소로 유명합니다. 골짜기가 긴 만큼 아픔의 역사도 오래 되었습니다. 가까이는 한국전쟁 전후로 지리산 빨치산의 근거지였습니다. 여순사건 이후로 지리산으로 후퇴한 김지회부대의 근거지도 이곳이었지요. 빨치산 총수 이현상도 여기에서 지리산 빨치산 회합을 하였습니다. 달궁이라는 곳에서 씨름도 하는 등 단합대회를 하였지요. 그만큼 희생도 컸었지요. 지금은 전적기념관이 살벌하게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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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뱀사골하면 뱀이나 이무기와 연관이 있어 그렇게 불리워지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사실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이곳의 배암사라는 절에서 '뱀사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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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선마을을 지나니 계곡가에 온통 철쭉이 피어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확인을 못해 수달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산봉우리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에 잠시 길을 멈추었습니다. 한 20여 년이 되었나요.  법계사에서 출발하여 지리산을 종주하고 뱀사골에 들렀더니 이 폭포가 있었습니다. 아마 인공으로 만든 폭포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세월이 지나니 자연폭포가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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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마을이라는 표지석이 길모퉁이에 있었습니다. 철제로 만든 아슬아슬한 구름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가 있겠지요. 다리를 건너 실제로 마을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귀차니즘에 빠져 손가락만 움직입니다. 이런 날이 자주 없는데 오늘은 그랬습니다. 지리산에만 오면 우울해지는 것은 지리산의 아픈 역사가 늘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래봉 철쭉을 보러 갔다 넘치는 인파에 놀라 이 길에 접어 들었습니다. 사실 그보다 큰 이유는 철쭉을 볼 용기가 없어서 였습니다. 지리산 철쭉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은 순간일 뿐 지리산에서 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피의 원혼을 보는 것 같아 늘 가슴 한 구석이 불편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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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아득한 '달궁'이라는 마을이 나타납니다. 지리산 골짜기에 이처럼 넓은 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쉽지 않습니다. 옛 마한의 한 부족국가의 왕궁이 여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황장군과 정장군이 성을 쌓아 이 궁을 지켰다고 합니다. 정령치와 황령치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지요. 지금도 정령치에는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 있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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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동네' 심원마을

골짜기를 따라 난 길이 점차 가팔라지기 시작합니다. '해발 850m' 표지석이 보입니다.
'하늘 아래 첫 동네' 라는 심원마을이 고개 아래로 보입니다.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마을은 지리산의 가장 깊은 오지마을이었습니다. 현재는 민박과 식당들로 오지의 맛을 잃어 버렸지만 물소리와 바람소리는 여전히 고요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아 한 때는 100여 가구에 이르렀지만 한국전쟁때 소개당한 후 사람들이 살지 않았습니다. 1958년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 살다 지금은 10여 가구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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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산 아래 마을보다 한 달 빠른 만큼 심원마을에는 봄도 늦게 왔습니다.
계곡의 보에는 여태 벚꽃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서늘한 냉기가 옷을 여미게 만듭니다. 늦었지만 봄은 지리산 산중마을에도 어김없이 찾아 오나 봅니다. 봄나물이 아직도 차가운 흙을 비집고 초록 새순을 내밀어 꽃을 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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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 이르니 바람이 매섭습니다. 사람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으리라 지리산은 다짐하나 봅니다.
노고단이 저 멀리 보입니다.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시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선도성모를 높여 노고老姑라 하고 제사를 모시던 곳인 신단神壇이 있다 하여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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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 본 노고단

'노고운해'라 하여 노고단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이 바다를 이루면 장관이지요. 오늘은 바람이 심하여 구름 한 점도 없습니다. 그 옛날 이곳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던 화랑들을 떠올리며 숨호흡 한 번 크게 해 볼 뿐입니다. 지대가 높아 여름이 서늘하여 일제시대 때에는 이곳에 선교사들의 별장이 있었지요. 아직도 노고단을 오르다 보면 산장 못 미쳐 별장터가 남아있습니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피서가던 선교사들을 지게가마에 태우고 힘겹게 산을 오르던 조선인들의 사진을 보면 서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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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재에서 본 지리능선 골짜기 아래가 산수유마을로 유명한 산동면이다.

추위도 달랠 겸 시암재 휴게소에서 어묵 하나를 먹었습니다. 따뜻한 국물에 속이 편안해집니다. 우리의 역사도 더 이상 질곡없이 따뜻하고 밝은 미래를 꿈꾸었으면 합니다. 이 지리산 관통도로는 천은사에 이르자 끝이 납니다. 육신의 편리함은 언제나 정신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 지리산도로의 편리함은 자연의 파괴라는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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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재에서 내려다 본 천은사 방면 지리산도로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 감로사라 불리던 천은사는 지리산의 고요한 산사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절집이지요. 원교 이광사가 물 흐르듯 쓴 일주문 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호수에 빠진 석양에 길을 떠났습니다.

스크랩과 보다 많은 여행기는
Daum 블로그 (
http://blog.daum.net/jong5629)를 참고하세요.

천은사 사진 보기(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63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