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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두 명의 황제를 배출한 '남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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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곳이 있다. '남연군묘'가 그러하다. 수년 전 다녀온 이후 뇌리속을 쉬이 떠나지 않았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명당의 지세를 감지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묘의 앉은 자리가 아늑한 데다 탁 트인 전망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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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남연군묘는 여전하였다. 다만 묘 앞의 은행나무가 너무 커버려서 시야를 가리고 묘 뒤의 나무들이 산의 흐름을 끊어놓은 듯하여 조금의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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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에 얽힌 이야기는 그 명성만큼이나 다양하다. 이 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무덤이다. 1822년 남연군이 죽은 뒤 한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고 한다. 혹은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인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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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풍수가)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二代天子之地) 가야산 동쪽의 땅과 만대에 영화를 누릴(萬代榮華之地) 광천 오서산을 지목하였다고 한다. 두말할 것 없이 흥선군은 가야산을 택하였다. 그런데 명당으로 지목한 자리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다. 흥선군은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기고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곳에 묘를 썼다. 흥선군은 후에 보덕사라는 절을 지어 그 죄책감을 씻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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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묘를 쓰고 난 7년 후 차남 재황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에 재황은 철종의 뒤를 이어 12살의 나이로 왕위로 오르게 된다. 그의 아들도 후에 순종이 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의 명칭을 얻게 되었으니 가히 2대 천자를 낳은 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터만 보면 지관의 안목이 대단함을 알 수 있지만 2명의 천자가 나온다는 설은 후대에 덧붙여진 해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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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는 풍수지리학상의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묘 뒤로 우뚝 솟은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좌로는 옥양봉과 만경봉이 청룡의 세를 이루고, 우로는 가사봉, 가엽봉, 원효봉 등이 백호의 세를 이루어 무덤을 감싸고 있다. 멀리 보이는 봉수산이 안산이 된다. 남연군 묘 앞의 논,밭이 가야사 자리이고 묘가 있는 언덕배기가 금탑이 있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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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들상여(재현품) 보호각 당시의 상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재현된 상여가 남연군묘 옆에 있다.
보호각의 창이 작아 상여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건물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배려가 중요하겠다.

남연군묘는 그 자리의 예사스럽지 않음을 대변하듯 조금은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언덕 옆에는 최근에 보호각을 지어 '남은들 상여'를 재현하여 보관하고 있다. 당시에 썼던 상여는 중요민속자료 제31호로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남연군묘를 이장할 때 운구했던 상여이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의 먼 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여서 상여가 지나는 길목마다 해당 지방민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상여를 마지막으로 운구했던 광천리(남은들) 사람들에게 이 상여가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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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사건과 그후의 천주교 박해,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로의 식민지화 등 일련의 역사를 상기해 보면 이 땅이 과연 명당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개인의 영욕은 충족되었을지라도 나라의 운명과 얽힌 이야기로는 너무나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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