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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단종의 장릉, 조선왕릉과 다른 몇 가지



단종의 장릉, 조선 왕릉과 다른 몇 가지

영월하면 먼저 단종을 떠올리게 된다. 구름도 울음보를 터뜨린다는 소나기재를 넘어서면 초입에 장릉이 있다. 12세의 나이에 왕이 되었다가 작은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땅으로 유배된 단종이 17세에 관풍헌에서 생을 마감한 곳이 영월이다.


청령포의 짙은 솔숲은 서강에 눈물을 쏟아내고 관풍헌에는 어린 단종이 피를 토해 울었다는 소쩍새(자규)의 한을 담은 자규루가 있다. 어린 나이에 심산유곡 청령포에 유배를 온 어린 왕의 비통함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았다.

재실 전경

관풍헌에서 죽은 단종의 주검은 아무도 거두지 않았다. 후환이 두려워서다. 이때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도망을 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충신위 32인을 비롯해 264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

몰래 시신을 옮기느라 자리를 고를 겨를도 없었고, 노루가 앉아 있는 터만 눈이 쌓여 있지 않아서 급히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니 죽어서는 편히 쉴 만한 곳이었나 보다.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배식단

조선의 왕릉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이 표본이 되었다. 그런데 이곳 장릉은 다른 조선의 왕릉에 비해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울에서 100리 밖의 외딴곳에 있다는 것이다. 조선 왕릉은 대개 서울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위치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제사 지낼 때 물이 더 많아진다는 영천

다음으로는 대개의 왕릉이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데 비해 장릉은 산줄기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능을 쓰게 된 연유가 다른 왕릉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단종의 생애를 기록한 단종비각과 능지기가 기거하던 수복실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무신석이 장릉에는 없다. 칼을 든 자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니 무신석을 두지 않고 문신석만 서 있다. 이외에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단종제라는 제향이 거행된다는 것이다.

정자각

단종 묘역 주위로는 충신위 32인을 비롯해 264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배식단이 있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기린 낙촌기적비 등이 있다. 이 또한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장릉은 다른 조선 왕릉과는 달리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단종의 무덤은 오랫동안 위치조차 알 수 없었다. 중종 때에 이르러 영월군수인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정비하였다. 숙종 24년인 1698년에 단종으로 추봉되고 ‘장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칼을 든 자에게 죽은 단종이기에 장릉에는 무신석은 없고 문신석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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