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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왕릉을 지키는 소나무 한 그루, 참 잘 자랐네!

 

 

 

왕릉을 지키는 소나무 한 그루, 참 잘 자랐네!

- 경주 낭산 신문왕릉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낭산 일대는 옛 신라의 중심지였다. 경주의 유명한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이곳은 찾는 이조차 드물어 한적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7번 국도를 따라가다 낭산 자락 여기저기 흩어진 천 년 전 왕릉들과 수많은 유적들을 마주치게 되면 이곳이 노천박물관과 다름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런 치장도, 꾸밈도 없는 옛 신라의 중심지를 입장료 한 푼 내지 않고 혼자서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일이다.

 

 

지난 연말인 29일, 남산을 오르기 전에 잠시 짬을 내어 낭산 자락 일대를 순례하기로 했다. 이 일대에는 진평왕릉, 효공왕릉,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신무왕릉, 성덕왕릉, 효소왕릉 등 옛 신라의 중심지답게 왕릉이 줄지어 있다. 이 왕릉을 한꺼번에 둘러보기는 무리여서 그중 서로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신문왕릉과 선덕여왕릉을 둘러보기로 했다.

 

 

신문왕릉은 7번 국도 바로 옆에 있다. 겨울인 데다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널찍한 주차장에는 차 한 대도 없다. 산도 언덕도 아닌 야트막한 구릉을 닮은 낭산 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진 곳에 돌담으로 가려진 왕릉이 있었다. ‘홍례문’이라 적힌 삼문을 삐꺼덕 여니 거대한 봉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방이 탁 트인 너른 평지 끝으로 울창한 솔숲이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평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솔숲과는 달리 삼문에서 왕릉에 이르는 길에는 기름한 소나무 몇 그루가 무덤을 호위하는 석상처럼 우뚝하니 서 있다.

 

 

그중 봉분 가장 가까운 곳의 소나무는 마치 일산처럼 왕릉을 향해 뻗어 있는데, 그 충성스러움이 거대한 줄기에서 그대로 뿜어지는 듯하다. 화려하고 근엄한 문인석과 무인석은 비록 없지만 이 소나무만으로도 왕릉의 근엄함과 위엄을 지켜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 잘 자랐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탑돌이 하듯 무덤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5단으로 정연하게 돌을 쌓고 그 위에 갑석을 덮은 석축은 이 고분을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아주 간결하고, 경건한 것으로 보여준다. 메주 모양의 석축은 반듯하면서도 경직되어 있지 않다. 사각형의 모양이나 각 지어 있지 않고, 직선의 날카로움이 무디어져 도리어 둥근 느낌을 준다.

 

 

봉긋 솟은 원형의 봉토분에 반듯한 석축, 그리고 이 석축을 지탱하기 위해 튼실한 둘레돌(호석)을 세워 왕릉은 한결 더 품위가 있다. 사디리꼴로 생긴 44개에 달하는 호석은 얼핏 제각기인 듯하지만 일정한 간격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고신라의 호석보다는 한층 발달된 형식으로, 십이지신상을 새긴 통일신라 왕릉의 호석이 나타나기 전 단계의 것으로 보인다.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의 왕릉은 밑둘레 92m, 지름 29.3m, 높이 7.6m이다.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이 있다. 바람도 멈춘 이곳에서 잘 가꾸어진 푹신한 잔디를 밟고 고분 둘레를 걷자니 절로 경건해진다.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맏아들 김정명. 재위 12년 동안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관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확립했으며, 지방통치를 위해 9주5소경을 설치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을 설치했던 왕. 후세에 의해 신라 전성시대의 기틀을 확립한 왕으로 평가받는 신문왕(재위 681~692)이 거대한 봉분 아래 잠들어 있다. 

 

 

 

신문왕릉은 사적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능을 신문왕릉이 아닌 효소왕릉으로 보고, <삼국사기>의 낭산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는 기록 등으로 낭산 동쪽 황복사 터 아래쪽 십이지신상이 남아 있는 곳을 신문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천왕사 터에서 본 신문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