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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신라 왕릉을 지키는 무사가 서역인이라니...

 

 

 

신라 왕릉을 지키는 무사가 서역 인이라니...

- 신라 왕릉 중 가장 완벽하다는 괘릉을 찾다

 

솔숲이 장하다. 굽은 나무가 조상의 묘를 지킨다고들 하지만 군락을 이룬 이곳의 소나무는 그 자체가 숲이 되어 장관을 만들어낸다. 못나고 굽은 나무라도 이처럼 뭉쳐 있으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괘릉의 소나무숲

 

솔숲의 맑은 기운을 따라 얼마간 들어가니 괘릉이 나왔다. 신라의 왕릉 중 가장 완벽하다는 괘릉은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시각은 이미 오전 10시를 넘기고 있었고 이곳이 경주 시내에서 떨어진 외진 곳이라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찾는 이 하나 없다는데 서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 서운함은 나중에는 고마움으로 변했다. 혼자 두어 시각, 고요함에 깊이 침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 김경신)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2012년의 마지막 날에 찾은 괘릉, 솔숲이 지극한 이곳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일들을 이곳에서 훌훌 내려놓고 갈 작정이었다. 영하 4도의 추운 날씨인데도 이곳은 햇볕이 넘쳤다. 괘릉은 솔숲이 병풍을 치듯 두르고 있는데다 볕이 잘 드는 양지에 자리하고 있어 한겨울인데도 가만히 있자니 좀 과장하자면 봄날의 기운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 김경신)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은 아직도 무덤 주위에 소복이 쌓여 있고 이따금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눈 위에 어지러이 남겨져 있었다. 괘릉은 한눈에 보아도 단정했다.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건 석조물이었다.

 

신라의 왕릉을 지키는 무사가 서역 인이라니...

화사석 두 기, 무인석 두 기, 돌사자 네 기가 능 앞 좌우에 정렬해 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연 무인석이다. 우락부락한 그 인상에 짐짓 놀라게 되고 우리와 다른 얼굴 생김새에 한 번 더 놀라게 됐다.

 

  괘릉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무인석은 놀랍게도 서역 인이다.

 

무인석은 서역 인이었다. 신라 왕릉에 서역 인이라니.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당시 신라에 서역 인이 살았다는 것일까? 하기야 그들이 실제 살지 않았는데 상상만으로 이렇게 섬세하게 묘사하는 건 애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덥수룩한 수염, 고슬고슬한 곱슬머리, 레이스 달린 드레스, 하나같이 당시 신라인과는 다른 용모를 가지고 있다.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전형적인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 인임을 알 수 있다.

 

  무인석은 덥수룩한 수염, 고슬고슬한 곱슬머리,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하고 있어 당시 신라인과는 다른 용모를 가지고 있다.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전형적인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 인임을 알 수 있다. 칼을 쥔 팔뚝이 다부지다.

 

<악학궤범>에 있는 처용의 초상화를 보면 푹 팬 쌍꺼풀눈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다. 처용의 생김새가 이곳의 무인석과 흡사하다. 그래서 처용도 서역 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849년 이븐 후르다드비가 쓴 아랍의 문헌 <도로들과 왕국들의 기록>에 신라가 소리 나는 그대로 적혀 있다. 이 문헌을 통해 아랍 사람들이 직접 신라로 진출해 무역을 하거나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괘릉의 무인성과 석상들

 

당시 신라의 무역항이었던 울산을 통해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이 대규모로 울산을 통해 교역을 했던 것이다. 울산에서 경주까지는 구조곡으로 낮은 평지로 연결되어 있다. 직선거리로 15km정도, 수레로 하루에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경주와 거리가 가까워 육로 교통이 편리했던 셈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관문성이라는 성이 있었고 지금도 기차와 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다. 괘릉이 경주와 울산을 잇는 7번 국도와 인접해 있다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서역 인의 인물상이 발견되는 곳은 괘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석, 구정동 고분 등에서다. 특히 구정동 고분에는 폴로 경기용 스틱이 묘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란의 대서사시 <쿠쉬나메>에는 페르시아 망명 집단과 신라 간 폴로 경기를 벌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보아 예전부터 서역과 신라의 교역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5, 6세기의 신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각종 유리제품 또한 당시의 활발한 교역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대개의 섬약하고 부드러운 문인석과는 달리 괘릉의 문인석은 강하고 다부진 인상이다.

 

기발하고 능청스러운 네 마리의 돌사자...

무인석을 몇 번이나 뚫어져라 바라보고 그 얼굴 생김새의 남다름에 놀라기도 했지만 바로 옆의 문인도 예사롭지 않았다. 대개의 섬약하고 부드러운 문인석과는 달리 괘릉은 문인석마저도 강한 인상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석상은 키도 훌쩍 커서 보는 이가 절로 기운에 눌리게 된다.

 

  모두 네 기인 돌사자는 위치는 그대로 두되 두 기의 고개만 살짝 틀어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게 한 신라인의 기발한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와는 달리 돌사자는 발랄하다. 네 마리의 사자는 두 마리씩 좌우에 배치되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그중 두 마리의 사자는 제자리에서 바른 방향을 보고 있는데 비해 나머지 두 마리는 고개를 심하게 틀어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각자 자리한 방향을 똑바로 보고 있으면 두 마리는 동쪽을, 다른 두 마리는 서쪽을 보고 있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나머지 두 마리는 고개를 틀어 남쪽과 북쪽을 보게 했다.

 

  모두 네 기인 돌사자는 위치는 그대로 두되 두 기의 고개만 살짝 틀어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게 한 신라인의 기발한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로써 석물의 위치는 그대로 두되 고개만 살짝 틀어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게 한 신라인의 기발한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곳의 돌사자는 각각의 방향을 지키고 능을 수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 그 능청스럽고 싱글벙글 장난기 어린 웃음을 보고 있자면 절로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괘릉의 석물은 요란하지 않고 꼭 있어야 할 것만 있는 그 간결함이 오히려 엄중하고 권위를 준다. 좌우로 각기 5기의 석물밖에 없음에도 능이 있는 곳까지는 제법 길고 깊게 느껴진다. 신이 나와 앉는다는 혼유석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고 장방형으로 제법 규모가 있다.

 

 

무덤 주위로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두르고 그 주위로 돌기둥을 세우고 돌난간을 둘러쳤다. 특히 호석의 중간 중간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활달하고 힘차서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또렷하다.

 

무덤 호석의 중간 중간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활달하고 힘차서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다.

 

 

왕릉 옆 솔숲으로 들어갔다. 탑돌이 하듯 두 손을 깊이 모아 무덤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하얀 눈을 인 봉분 위로 파란 하늘이 시렸다. 바람마저 추위에 멈추더니 솔숲에는 햇볕이 조용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괘릉의 소나무숲

 

 

무서우리만치 깊은 고요가 흘렀다. 제멋대로 구불구불 휘어진 소나무들이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하늘을 향해 열 지어 뻗어있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몇 번이나 솔숲을 들락날락하며 소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이 기묘한 분위기를 담으려 애를 썼다.

 

 

왕릉의 정적을 깨는 일단의 사람들...

갑자기 숲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리 희미하게 들리던 소리가 점차 또렷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다가왔다. 무덤을 감싸고 있던 고요는 뒤늦게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무덤 주위로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호석을 두르고 그 주위로 돌기둥을 세우고 돌난간을 둘러쳤다.

 

드디어 왕릉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10여 분 왁자지껄 떠들고 사진 몇 장 찍더니 후다닥 차를 타고 사라졌다. 뭐가 그리 바쁜지, 여행까지 와서 경쟁이라도 하듯 얼른 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아직 우리 여행문화는 여유가 없다.

 

 

잠시 뒤에 왕릉 앞에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차 두 대가 멈춰 섰다. 왕릉 앞으로는 찻길이 나 있다. 철난간이 둘러쳐져 있지만 누군가에 의해 파손되어 뻥 뚫려 있다. 그 무너진 틈으로 두 대의 차량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리더니만 석상을 바삐 사진에 담고 왕릉은 멀찌감치 서서 잠시 훑어보더니 이내 차를 차고 사라졌다.

 

괘릉이라는 이름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고여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햇빛은 넘쳤고 고요가 깊었다. 두어 시각을 넘기고 난 후에 여행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괘릉의 무인석과 석상들

 

☞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 김경신)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봉분의 밑둘레는 70m, 지름 21.9m, 높이 7.7m다. ‘괘릉’으로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고여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괘릉은 사적 제26호로, 석상 및 석주 일괄은 보물 제1427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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