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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울창한 금강송 군락지 조선의 명당 영경묘를 걷다

 

 

울창한 금강송 군락지 조선의 명당 영경묘를 걷다

 

사실 처음부터 영경묘를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태백에서 삼척으로 넘어가면서 중간에 들를 만한 곳을 찾다가 준경묘의 솔숲이 장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근데 길을 잘못 들어 준경묘를 지나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더 가까이 있는 영경묘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던 것이다. 널찍한 주차장을 가진 준경묘에 비해 영경묘는 차 한 대 세울 공간도 없어서인지 찾는 이가 없어 한적하게 걷기에는 그만이었다.

 

 

목조대왕구거유지와 준경묘․영경묘의 재실이 있는 활기리에서 아주 비탈진 고개 하나를 넘으니 영경묘가 있는 하사전리다. 길은 포장되어 있으나 비탈진 산에 그대로 아스팔트를 바른 거나 매한가지의 급한 경사였다. 좁은 산마을에 집 몇 채가 있고 작은 개울 건너로 영경묘 안내문이 보였다.

 

 

영경묘까지는 200m. 금세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발걸음도 가볍다. 처음의 암팡진 오르막도 잠시, 왼쪽으로 틀어진 산길의 끝으로 홍살문이 어렴풋이 보인다. 양쪽으로 사열해 있는 솔숲 사이로 어른 네댓 명은 함께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입구가 홍살문으로 이어졌다.

 

 

홍살문 너머 곱게 깔린 잔디 안쪽으로 야트막한 구릉을 등지고 전각 두 채가 있다. 혹시 제각 뒤로 묘지가 있나 했으나 묘까지는 산길로 100m를 더 올라가야 했다. 이곳이 입구에서 묘까지의 중간쯤 되는 거리였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그냥 고만고만하게 보이던 솔숲이 갑자기 형세를 달리했다. 한마디로 ‘장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하늘로 쭉쭉 뻗은 그 늘씬한 자태에다 어른 둘이 껴안아도 잡히지 않을 가슴께의 둘레는 우리가 흔히 보는 구불구불한 소나무와는 분명 격이 달랐다. 유난히 붉은 데다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긴 이곳의 금강송은 한눈에 봐도 미끈하게 잘 생겼다. 한마디로 이곳 솔숲은 수려했다.

 

 

처음의 놀라움은 묘역이 가까워질수록 울창한 송림이 온 산에 가득하다는 걸 알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알고 봤더니 금강송 혹은 황장목으로 불리는 이 소나무들은 이 일대 두타산의 울울창창한 금강송 군락지 중의 한 곳이었다. 특히, 준경묘 일대의 소나무들은 궁궐 건축과 문화재 복원 목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숭례문 복원 때 준경묘의 소나무를 일부 사용하기도 했단다.

 

 

장한 소나무들 사이에 활엽수들이 낮게 드리워져 있어 영경묘 가는 산길의 운치를 더해준다. 벌써 잎을 떨어뜨린 나무들 아래를 자분자분 걷다 보니 어느새 숲으로 움푹 들어간 산길이 휘어지며 묘가 나타났다.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기단엔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더욱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묘는 의외로 간소했다. 아무런 석조물도 없이 고요한 숲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영경묘에선 알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느껴졌다. 묘역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영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이안사)의 어머니인 평창 이씨의 묘이다. 남편 이양무의 묘인 준경묘와는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다. 준경묘는 활기리에, 영경묘는 하사전리에 있다.

 

 

이씨 부인이 남편 이양무와 함께 전라도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목조가 이곳에 어머니를 안장한 후 다시 함경도로 이주했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을 한 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수호군을 두어 관리를 했다. 고종 때인 광무 3년(1899)에 묘호를 영경(永慶)으로 공식 추봉하고, 묘소 수축과 재각 및 비각 건립 등 대대적인 정비를 했다.

 

 

이곳은 명산으로 알려진 두타산의 지맥에 자리를 잡고 있다. 준경묘와 같이, 고려시대 이후 꽤 이름이 알려진 풍수로부터 조선 왕조의 태동을 비롯해 500여 년 왕조의 정기를 이을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고 한다.

 

 

이 명당설과 관련하여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이양무가 세상을 떠났다. 목조가 묘 자리를 찾던 중 산속에서 한 도승이 동자승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듣게 된다. “이곳에 장사를 지내면 5대 안에 한 나라를 개국하는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려면 개토제[각주:1] 때 100마리의 소를 제물로 바치고, 금으로 만든 관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는 궁리를 한 끝에 100마리의 소(百牛)를 흰 소(白牛)로 대신하고 금으로 만든 관은 귀릿짚으로 대신하여 부모를 안장했다.“

 

 

이처럼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에 부모를 안장한 이후 5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태어나고 조선을 창업했다는 전설이다.

 

 

묘 뒤를 올랐다. 멀리 산자락이 손에 잡힐 듯 아스라이 펼쳐졌다. 그제야 이곳이 왜 명당이라고 말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주위 산세들이 이 터를 멀리 혹은 가까이서 한없이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바람마저 자취를 감추고 정적마저 숨을 멈췄다.

 

 

준경묘·영경묘는 남한 지역에 소재하는 조선 왕실의 선대(先代) 능묘이자, 조선왕조 태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 가치 등을 평가해 2012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1. (집을 짓거나 묘지를 조성하기 위해 땅을 처음 팔 때,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