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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허황후는 과연 인도 사람인가

허황후는 과연 인도 사람인가
- 도심속의 고분 산책, 수로왕릉


몇 년 만에 다시 김해를 찾았다. 옛 가야의 흔적을 찾아 걸음을 했건만 잘 정비되어 있는 가야의 유적들에 마음은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공원처럼 정돈된 유적들에서 가야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만 가야를 역사 속으로 껴안으려는 김해 시민들의 애정은 충분히 와닿는다.

수로왕릉에서 본 분산성

수로왕릉은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근래에 지어진 각종 전각들이 가야의 흔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왕릉 정문(쌍어문)에 새겨진 물고기 두 마리나 숭선적 외벽의 수로왕 천강도, 허황후 도래도 등을 보면 잊혀진 옛 가야 왕국을 그려볼 수가 있다.


잃어버린 신비의 고대 왕국인 가야의 실체는 유적 곳곳에서 느낄 수 있지만 매우 단편적이다. 다만 '삼국유사'에 실린 수로왕 이야기는 풍부한 편이다. 나라 이름도 아직 없고 왕과 신하의 호칭도 없던 서기 42년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였기에 여기 구지봉에 온 것이니, 너희들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아니 내어놓으면 구워 먹으리라'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대왕을 맞이하라" 는 것이었다.

수로왕릉

이에 부족장들이 그 말을 따라 춤을 추고 노래하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땅에 닿았다. 줄 끝을 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그 안에는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고 12일이 지나 금합을 다시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여섯아이로 변해 있었다. 용모가 준수하고 십수일이 지나니 키가 9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윽고 왕위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그 이름을 '수로' 혹은 '수릉'이라 하였다.

수로왕릉 정문의 물고기 두마리 문양. 이 문양은 인도의 아요디아(아유타국) 고유의 것으로 허황후의 인도 도래설을 증명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수로가 나라를 열었다는 것은 가야가 이주민에 의해 성립된 국가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는 부족장에 의해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다.

대숲에 둘러 싸인 아담한 안향각

서기 42년 금관가야의 왕위에 오른 수로왕은 가야 연맹체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 탈해와 왕 자리를 놓고 다투기도 한다. 이것으로 보아 왕위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기 48년에는 망산도에 신하를 보내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

허황후의 출발지가 인도의 '아요디아'가 아니라 태국의 '아유티야'거나 중국 사천성의 '보주'지방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태국의 '아유티야'는 인도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에 건설한 식민국인 데서, 사천성 '보주'라는 주장은 허황후의 시호가 '보주태후'인 데서 비롯된다.


당시의 항해술로 3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인도에서 김해까지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도 있지만 수로왕릉의 물고기 문양은 인도 아요디아 풍이 확실하며,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왔다는 수로왕비릉의 파사석탑은우리나라에서 볼 수없다는 석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가야, 가락 이라는 말은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아어로 둘 다 모두 '물고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수로왕은 제도를 정비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성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로왕과 허황후는모두 아들 열과 딸 둘을 낳았다고 하니 부부 금실도 좋았던 모양이다. 허황후는 157세, 수로왕은 158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요즈음 시대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장수를 하였다.


수로왕릉 인근에는 가야 유적이 많다. 걸어서 다녀도 될 정도로 몰려 있어 역사 공부와 산책삼아 도심을 걸어 보는 것도 좋다. 구지봉, 수로왕비릉, 봉황동 유적, 분산성, 한옥체험관, 고분박물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동선을 고려하여 여행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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