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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600년 시간의 숲을 거슬러 가다. 영릉



600년, 시간의 숲을 거슬러 가다.
영릉

지난 주말 여주를 다녀왔습니다. 일 년에 몇 차례 가는 곳이지만 늘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여주 땅 구석구석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겨우 시간을 내어 십여 년 전에 가보았던 영릉을 다시 갔습니다. 예전에는 건성건성 보았던 곳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4대강으로 영녕릉이 위태롭다는 말을 들었기에 인근의 남한강과 이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은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능선 하나를 넘으면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녕이 있습니다. 호젓한 맛은 녕(영)릉이 좋다고들 하나 깊숙한 골짜기에 있어 좁은 편입니다. 이에 비해 세종의 능인 영릉은 전에도 그랬지만 호방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어쨌든 두 곳 모두 소나무 숲의 청정한 기운이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은 거의 일정하게 배치됩니다.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입니다. 소헌왕후의 능을 쓰면서 빈 석실을 마련했다가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 합장했습니다.

영릉에 들어서면 세종대왕 동상과 재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재실은 능에서 떨어진 홍살문 밖에 있습니다. 제관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지요.



현판인 훈민문은 세종의 뜻에 맞게 한글로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뿌듯한 일이지요. 당시 한글을 업신여기던 신하들이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음에도 세종은 단호하게 거부하며 한글을 창제하고 널리 알리게 됩니다.


훈민문을 지나면 너른 능역이 펼쳐집니다. 따뜻한 햇살을 피해 그늘에는 아직 눈이 남아있습니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이들이 앞서 뛰어갑니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 사진에 담았습니다.


금천교에서 아이들이 걸음을 멈춥니다. 여행자도 잠시 쉬었습니다.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흔히 '어구御溝' 혹은'금천錦川'이라 부릅니다.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하지요. 금천교의 안쪽은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입니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배산임수의 의미로 산에서 흘러나온 땅의 기운이 물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홍살문에서 참도를 따라 걷다 보면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각이 보입니다. 정자각은 한자의 정자 모양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례 때 제물을 차리고 제례를 올리던 곳입니다.


정자각을 오르는 층계는 동서 양쪽으로 있습니다. 제례의식을 할 때 동쪽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신계의 좌우로 두 개의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정자각 안의 뒷벽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제례를 드릴 때 열어 놓게 되어 있습니다. 왕릉 앞에는 일반묘의 상석과 같은 혼유석이 있습니다. 물론 그 쓰임새는 다릅니다. 일반인들의 묘에 있는 상석은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쓰입니다. 이에 비해 혼유석은 정자각 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 능에 묻힌 혼백이 혼유석에 앉아 제사 광경을 지켜보는 곳이라고 합니다.


정자각의 오른쪽으로 난 길에는 잘 생긴 반송 한 그루가 있습니다. 반송 아래로 수복방이 보입니다. 능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반송이 그 수고로움을 위로해 주는 듯합니다.
 

수복방 위에는 비각이 있습니다. 영릉은 원래 태종의 능인 헌릉이 있던 지금의 서울시 내곡동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태종의 곁에 누우려는 세종의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곳은 터가 좋지 못하여 세종이 승하하고 난 후에도 늘 천장 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


결국 예종 대에 이르러서 지금의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능을 천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천장을 하기 전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합니다.


어느 날 지관과 정승들이 능을 옮길 곳을 찾으러 나섰는데, 지금의 영릉 부근에 이르자 소나기가 퍼부었습니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어 가보니 재실이 있었고 비도 멎었다고 합니다. 그 위에 올라가보니 천하명당이었다고 합니다.


세종의 능은 원래 이계전이라는 사람의 묘자리였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계전이 죽으면서 자기 묘 주위에 재실이나 다리를 놓지 말라고 유언을 했는데, 후손들이 재실과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합니다. 그 후 영릉을 이장할 자리를 찾던 지관이 소나기를 만나게 되어 이계전의 재실에 들어가 비를 피하던 중 산세를 보니 이계전의 묘자리가 천하의 길지였습니다. 이를 왕에게 추천하는 바람에 묘자리가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각에서 언덕을 오르면 곡장(무덤 담장)에 둘러싸인 봉분이 있습니다. 한 봉분에 세종와 소헌왕후를 합장한 조선 최초의 합장릉입니다. 봉분 둘레는 돌난간을 두르고 그 앞에 합장릉임을 나타내는 혼유석 두 개가 있습니다. 팔각으로 다듬어진 장명등과 석상, 석마, 문인석, 무인석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영릉에 서 보면 왜 옛사람들이 이곳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탁 트인 푹광과 숲이 주는 맑음은 굳이 명당을 논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선의 국운이 이 영릉으로 인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지관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소나무가 길게 그늘을 드리웁니다. 나무그늘을 보다 무심코 작은 석함을 보았습니다. 망료위라고도 부르는 예감입니다. 능에서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태우던 곳입니다. 
 
영릉을 나와 남한강으로 갔습니다. 바로 옆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여주보가 강을 막고 하늘로 가는 바벨탑처럼 높이 쌓인 모래언덕이 있었습니다. 중장비는 굉음을 내고 정신없이 도로와 강변을 질주합니다. 세종의 능인 영릉은 그나마 강에서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효종의 능인 녕(영)릉은 바로 강변입니다. 댐처럼 거대한 여주보에 물이 차면 녕(영)릉은 강물 수위보다 더 낮게 됩니다. 지금도 도로 일부가 침하되고 있는데 이곳 영녕릉이 괜찮을지 의문입니다.

600년의 시간을 흘러온 이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 오랜 세월에도 42기의 능 중 어느 하나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중요한 가치로 여겨 능을 엄격하게 관리했기 때문입니다. 혹여  조선 500년의 가치가 지금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글을 만드는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인데 뭐가 나쁘단 말이냐?” 한글에 반대하던 사대주의 학자들의 상소를 단호히 물리쳤던 세종의 의지를 지금 이 시대의 지도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일까요? 백성을 이롭게 하는 지도자는 정녕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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