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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담다

여덟 살 딸도 감동한 더위없는 하늘정원




여덟 살 딸도 감동한 더위 없는 하늘정원
-더위 없이 산책할 수 있는 야생화의 천국, 노고단

오랜만에 지리산으로 다시 갔습니다. 한때 지리산에 미쳐 능선과 골짜기마다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지리산 암자를 순례하다, 어느 겨울에는 지리산 돌장승 기행을 떠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진 기록이 제대로 없어 다시 지리산을 찾을까 합니다. 앞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틈틈이 지리산 자락을 다시 사진에 담을 생각입니다.


주말 아내와 딸 셋이서 노고단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혼자 가는 산행이 아니어서 가장 쉬운 코스를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 흔한 둘레길은 아니고, 연기암 가는 길과 노고단을 산책할 생각이었습니다. 여덟 살 아이는 가고 싶지 않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고서도 한참이나 입을 삐죽 내밀더니 겨우 따라 나섭니다.

산수국

성삼재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경이었습니다. 시원한 물 한 통을 사고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말이 산길이지 차도 다닐 만큼 널찍한 길입니다. 제일 먼저 만난 꽃은 산수국입니다. 산 아래서 보는 탐스런 수국과는 달리 은은한 맛이 있습니다.


앞으로 등산을 자주 하겠다며 처음으로 배낭을 산 아내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마치 산꾼이라도 된 것처럼 배낭을 멘 모습에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왠지 어색한 그 모습에 자꾸 웃음이 터집니다.


"나 안 가면 안 돼."
"안 돼"


아내의 말은 단호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나들이를 싫어하는 여덟 살 딸애입니다. 아비 때문에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영덕으로 첫 여행을 갔고, 세 살 때 다산초당과 화왕산을 올랐습니다. 일곱 살 때 제주 올레 가파도와 지리산 둘레 인월-금계 구간을 걸었습니다. 최근에는 한여름 땡볕에 함양선비길을 걸을 정도로 건강한 아이입니다.

"어휴" 하더니 아예 길가의 평상에 주저앉습니다. 몇 번 꼬드기고 실랑이를 한 끝에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동자꽃
꼬리풀

질질 끌려가던 아이가 힘을 낸 곳은 나무계단이었습니다. 제가 먼저 가위바위보로 계단 오르기 게임을 제안했고 아이는 금세 즐거워하더군요. ‘세상, 저렇게 단순하게 살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한층 기분이 난 아이는 카메라를 꺼내더니 야생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꽃들이 많다며 아이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이럴 때 아이의 흥을 더욱 돋우어야 했습니다. 노고단까지 둘레길로 가면 왕복 7km 정도, 세 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에 아이의 기분을 한층 올려야 우리 부부가 편해집니다.


늘 하는 점프 샷, 하나 둘 셋, 이 순간만큼은 아마 제일 행복할 겁니다. 느릿느릿 걸으니 4시가 넘어서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아이스크림으로 최후의 입막음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맛동산’ 한 봉지를 샀습니다. 산이나 군대에서 가장 잘 먹히는 건 역시나 단맛 나는 과자류입니다. 아이가 봉지를 빼앗아 부리나케 노고단으로 뛰어갔습니다.


노고단 정상은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3시 까지 출입을 해야 정상 산행이 가능합니다. 예전에 몇 번 왔던 적이 있어서 오늘은 정상에 굳이 목맬 이유는 없었습니다. 대신 느긋하게 야생화 천국인 이 일대를 느긋하게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노고단 정상부 인근에는 원추리를 비롯해 둥근이질풀, 동자꽃, 범꼬리, 비비추 등 100여종의 토종 야생화가 꽃을 피워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꽃이 많으니 노고단은 ‘하늘정원’, ‘천상의 화원’, ‘야생화 천국’ 등 갖은 별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린초
둥근이질풀

비비추

술패랭이
노루오줌과 꼬리풀
지리터리풀.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지리'라는 말이 붙여졌다.
노루오줌
하늘말나리
원추리

날씨도 선선하니 걷기에 제격입니다. 아래 마을에서는 32도였는데 성삼재에 도착하니 25도였습니다. 온도가 7도나 차이 난 것입니다. 옛날 왜 이곳에 외국인들의 별장이 있었는가는 노고단에 오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KBS중계탑 방향으로 에둘러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지름길인 돌계단길보다 1km 이상을 둘러가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느릿느릿 걷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길입니다. 날씨라도 좋은 날이면 그 장엄한 노고운해를 볼 수 있는 행운도 따릅니다. 오늘은 온통 안개뿐입니다.


대피소에 이르자 아이가 풀썩 주저앉습니다. 자연스러운 표정이라 사진에 담았습니다. 잠시 쉬면서 ‘맛동산’을 먹고 힘을 얻은 아이는 내쳐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족 단위로 산책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한 가족은 지리산 종주를 할 모양입니다. 묵직한 배낭을 진 부부와 조금 가벼운 배낭을 멘 두 아들이 땀을 흘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막내로 보이는 아이는 정말 가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이 반쯤 나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한 꼬마아이가 압권이었습니다.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도 달래기를 몇 번, 끝내 포기를 하고 맙니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 카메라를 갖다 대자 아이는 짓궂은 표정으로 포즈를 취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엄마도 어이가 없는지 한바탕 웃었습니다.


6시가 다 되어서 성삼재에 도착했습니다. 건각이면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3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그래도 여행자는 이런 느림의 여유가 좋습니다. 산에 오면 딱히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2008년 당시의 노고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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