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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 기행

남한강 제일의 강변 포구 '목계나루'

서울 마포까지 뱃길을 잇던 남한강 충주 '목계나루'
- 바람이 강을 흐르다



 

충주. 중앙땅이라 하여 중원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계립령, 죽령, 새재길이 여기로 이어지고 남한강 물길이 이곳을 지나간다. 교통의 요지인 충주에는 조선시대 남한강 수운의 중심으로 가장 큰 포구 가운데 하나였던 '목계나루'가 있다.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시작되는 남한강 물줄기는 강원도의 정선, 영월을 지나 충청북도 단양, 제천, 충주를 거쳐 경기도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한강을 이루어 서해로 흘러간다. 나라의 중심부를 흘러 서울까지 이어지는 남한강 물길은 그 옛날 중요한 수운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조선조 초기만 해도 여주 위의 남한강 상류에는 가흥창, 목계, 충주, 매포, 영월 등의 큰 마을이 있어 수많은 배가 강을 오르내렸다. 내륙에서 난 쌀, 고추 등의 농산물을 서울 마포나루로 실어가고 대신 서해에서 난 소금, 젓갈 등의 해산물과 생활품 등을 남한강 상류의 포구로 날랐다.



 

 포구에 도착한 물품들은 봇짐장수에 의해 소백산맥을 넘어 내륙의 깊숙한 산간지역까지 풀려갔다. 처음의 소규모 거래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이곳 목계나루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목계나루 이상 내륙의 포구는 봄, 가을 갈수기에 수심이 얕아 큰 배가 다닐 수 없어 수심이 깊고 넓은 백사장이 있는 목계나루가 자연 번성하게 되었다.



 

 내륙지방의 육로 중심지에 위치한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가진 목계나루에는 쉴 새 없이 배가 드나들었고 나날이 몰려든 상인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장꾼들과 놀이꾼들이 난장을 벌이고 100미터가 넘는 목계 줄다리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실 목계나루가 번성을 이룬 데는 지금의 목계교에서 조금 내려간 하류에 있었던 조창이 큰 몫을 하였다. 고려시대에 세곡을 운송하기 위해 곡식 200섬을 싣는 배 스무여 척이 배치된 덕흥창이 설치되어 성황을 누리었다. 이후 덕흥창은 조선 초기에 경원창으로, 다시 세종 때 덕흥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세조 때 가흥역 근처로 옮기면서 가흥창으로 불리게 되었다.



 

 목계나루는 1930년대 들어 충북선 철도가 놓이면서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1973년 이곳에 다리가 놓이면서 나룻배가 사라지고 목계나루는 더 이상 번성하던 예전의 수운 중심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옛 시절 뱃사공과 상인들이 쉬어갔다던 솔밭만이 강 언덕에 남아 있을 뿐 영화로운 옛 나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람만이 강을 흐를 뿐이다.



 

‘농무’의 시인으로 유명한 충주 출신의 시인 신경림은 ‘목계장터’라는 시를 지어 옛 나루를 추억하였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나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중략)...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중략)...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http://blog.daum.net/jong5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