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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 기행

붉은 노을 내뿜는 율포의 기억




붉은 노을 내뿜는
율포의 기억

꽁꽁 얼어붙은 겨울, 보성을 찾았습니다. 질펀한 벌교 5일장을 둘러보고 나니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아내가 전에 가보았던 해수녹차탕에서 몸을 녹이고 갔으면 해서 율포로 갔습니다.


율포는 득량만 깊숙이 자리한 작은 포구입니다. 이 한적한 포구마을이 여름이면 물놀이 피서객들로 넘쳐나지만 겨울이면 원래의 한갓진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밤개'라고 불리는 이 바닷가마을은 지형이 늙은 쥐가 밤을 주워 먹는 형국이라 밤율(栗) 자에, 개포(浦) 자를 써서 ‘율포’라 했습니다.


보성녹차밭이 지척에 있음에도 외지인들은 대개 이곳까지 부러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는 이 한적한 바닷가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해수탕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딸아이는 아직입니다. 혼자서 해변을 걸었습니다. 간혹 드문드문 보이는 가족들이 고작입니다.


그것도 잠시, 해변에는 여행자 혼자 남았습니다. 1km가 넘는 긴 모래해변을 그냥 걸었습니다. 해변은 쓸쓸한 맨몸을 드러내고 여행자는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이따금 보이는 조개껍질과 끼룩끼룩 대는 갈매기. 다시 무서운 정적이 흐릅니다.


혼자라는 걸 지우려 해변 모래밭에 발자국을 새겼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을 마저 찍고 나니 쓸쓸함이 가시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발자국 너머로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나타났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습니다. 딸아이였습니다.


아이는 솔숲을 가로질러 해변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왔습니다. 그러더니 파도 앞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파도와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던 아이는 결국 파도를 당해내지 못하고 풀쩍 뛰어버립니다. 그러기를 한참, 멀리서 배 한 척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습니다. 풍경의 하나로만 보이던 이곳에도 고단하고 거친 삶이 있는 포구라는 걸 말이죠.


보성에서 태어난 문정희 시인은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숨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먹이를 건지는/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라고 율포를 기억했습니다.


쓸쓸한 맨살을 한참이나 비추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내 어둠이 내렸습니다. 여행자도 저 무위한 해조음을 뒤로 하고 포구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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