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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 기행

바다가 아닌 육지에 웬 등대! 영산포등대







바다가 아닌 육지에 웬
등대! 영산포 등대

장어로 유명한 구진포를 접어드니 길은 영산강을 따라 이어졌다. 쌓인 눈이 얼었다 녹았다하다 보니 도로는 엉망이다. 강변 풍경에 눈길을 줄 수 없음은 당연, 핸들이 미끄러질 새라 잔뜩 긴장을 한다. 나주 여행 이틀째, 여행자는 여전히 길에서 헤매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영산포에 이르렀다. 비릿한 홍어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건물들에는 하나같이 홍어 간판이 달려있다. 이곳도 1박2일 팀이 다녀갔다. 대문짝만한 현수막이 눈에 띈다.


그 옛날 이곳은 번화했던 포구였다. 바닷길을 거슬러 올라온 수많은 배들이 강의 포구에 정박을 했다. 싱싱한 해산물하며 상인들이 고래고래 흥정을 하며 즐비하게 서 있었을 옛 거리는 관광객들의 차지가 되었다.


온갖 물품들을 살고 파던 옛 장시의 기억은 홍어 거리에서 느껴진다. 홍어를 싣고 흑산도를 떠난 배가 영산강 뱃길을 따라 오면 자연 숙성이 되어버렸다. 잘 숙성된 홍어는 영산 포구를 통해 나주로 와서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삭힌 홍어가 되었다.


홍어를 맛보고 싶었으나 일정도 여의치 않고 아내와 딸애가 먹지 못하는지라 등대로 향했다. 등대가 어디 있을까.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지나는 이에게 물어보았다. “바로 저기라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다. 길을 건너 다른 이에게 다시 물어보니 “여기 올라가 보시오.” 한다. 제방에 올라서니 그제야 머리를 내민 등대가 보였다.


제방 벽면에는 예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라고는 없다. 하얀 자리를 어지럽힐까 발을 내딛기가 괜스레 미안해진다. 아이도 뒤를 따른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를 따른다.


제방을 따라 등대까지 갈 요량이었으나 도저히 갈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제방을 내려왔다. 다리로 향했다. 그곳에 서면 등대가 잘 보일 듯했다. 영산포에 등대가 선 것은 일제시대인 1915년이었다.


내륙 깊숙이 자리한 영산포구는 고려시대 수운의 발달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후 구한말 목포항 개항과 함께 전라남도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일제는 이곳에 1910년도에 개폐식 목교, 15년에는 등대, 30년대에는 콘크리트 다리를 건설했다. 아마 이것은 비옥한 나주평야의 쌀을 수탈해가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고 난 다음해인 1915년에 등대가 세워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산포 등대는 해마다 범람하던 영산강의 수위 측정과 등대 기능을 위해 세워졌다. 1970년대 영산강에 하구언이 생기면서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잃게 되고 등대 또한 수위 측정 시설이 영산강에 새로이 생기자 1989년 이후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활기가 넘쳤던 영산포는 예전 영산창이 있었다는 기록을 봐도 얼마나 번성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상업적인 필요에 의해 영산강을 따라 형성된 40여개 포구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영산포 일대의 이창동과 영산동에는 일제시대 가옥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해방 후에는 이곳 일대에 130여 채의 일본식 가옥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영산포 등대는 나주시 이창동에 있다. 영산 포구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이 등대는 2004년 12월에 등록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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