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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담쟁이덩굴이 좋은 '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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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예부터 성곽의 나라였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세워진 성곽은 산성 위주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미치면서 읍성들이 많이 세워졌다. 외적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한 읍성은 성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국에 190여 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해미읍성은 행정기능과 군사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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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문 해미읍성의 남문으로 홍예를 올려 멋을 부렸다. 성벽의 담쟁이덩굴이 예스러움을 더해준다.

현재 전국적으로 잘 보존된 읍성과 일부만 남아있는 읍성을 합치면 60여 곳이나 된다. 서해안 쪽에도 인근의 보령읍성, 홍주성, 면천읍성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해미읍성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전북의 고창읍성과 전남 낙안읍성에 견줄만하다. 다만 고창 읍성이 산등성이에 있어 전망이 뛰어난 데 비해 해미읍성은 평지에 있어 성을 바라보는 맛이 덜하다. 낙안읍성이 성내에 민가가 있어 삶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에 비해 이곳은 최근에 복원된 건물 몇 채를 제외하면 휑한 느낌이 들어 쓸쓸함마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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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에서 본 진남루 누각에 오르면 해미읍성과 주위 풍경이 다 들어온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에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있을 정도로 인근에서 중심이 되는 고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효종 2년인 1651년에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면서 그 중요성이 감소되었다. 원래 읍성 내에는 민가 등이 있었으나 1973년 복원사업을 하면서 모두 철거하였다고 한다. 아쉬운 일이다. 최근 새로 정비를 하고 있지만 낙안읍성의 생동감을 이곳에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우리네 전통 한옥뿐만 아니라 이런 성곽들도 사람의 온기가 있어야 온전한 제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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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 모습 민가 등이 철거되어 휑한 느낌마저 감돈다.

해미읍성의 볼거리 주의 하나는 담쟁이덩굴이다. 성벽에 치렁치렁 매달린 담쟁이덩굴은 이 읍성의 예스러움을 더해 준다. 밋밋한 돌덩이에 생명을 불어 넣는 역할도 하니 담쟁이덩굴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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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볼거리는 진남문이다. 원래 동, 서, 남의 3대문이 있었다고 하나, 남문인 진남문만 원래의 모습일 뿐 나머지 두 문은 1974년에 복원되었다. 진남문은 멋드러지게 올린 홍예로 문을 삼아 그 위에 누각을 세웠다. 누각에 오르면 읍성의 모습과 주위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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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뙤얕볕이 강하게 내리쬐어 성을 한바퀴 돌기는 어려웠다. 읍성에 가면 항상 성을 밟으며 눈과 발을 즐겁게 했는데, 아쉬움이 든다. 해바라기와 원두막이 여름의 절정을 말할 뿐이다. 자갈길을 조붓조붓 걸으며 더위를 잊으려 애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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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간에 건물 몇 채가 있다. 예전 해미영의 감옥을 복원해 놓았다. 바로 앞에는 회화나무(충청도에서는 호야나무라고 한다.)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장대하게 서 있다. 흔히 지나치게 마련이지만 사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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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땅은 충청도에서도 선진문물이 일찍 전파된 곳이다. 천주교인도 자연스럽게 늘어나 이후 박해 때에 순교자도 그만큼 늘었다. 1790~1880 년 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되어 있던 천주교도들이 이 호야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목매달려 죽임을 당하였다. 흔히 나무 가지의 뻗음이 선비의 기상을 닮았다 하여 '선비수'라고도 불리는 이 회화나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인을 생매장한 해미천 등 해미읍성 인근이 천주교 순교의 역사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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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나무(회화나무) 이 나무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고문과 죽임을 당하였다.

무거운 마음에 성 위에 다시 올라본다. 옹성 위의 망루위로 잿빛 구름이 가득하다. 한바탕 비라도 쏟아지면 육신도, 마음도 시원하겠건만.......
해미읍성은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어 '탱자나무성枳城'이라고도 하였다.
해미읍성은 태종14년인 1414년부터 효종 2년인 1651년까지 군사의 중심지였으며 세종 3년인 1421년에 읍성을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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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와 옹성 옹성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옹성보다는 치가 맞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