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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

성을 세 바퀴 돌면 극락 간다는 ‘고창읍성’


 

성을 세 바퀴 돌면 극락 간다는 ‘고창읍성’

- 가을 옛 성 밟기의 즐거움, ‘고창읍성’


 

돌을 머리 위에 이고 성을 돌면 극락에 간다.

 돌을 머리 위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성을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갈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낮은 야산에 희끄무레한 띠처럼 보이는 고창읍성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는 성밟기 풍속은 윤달, 그 중에서도 윤삼월에 해야 효험이 있다고 한다. 특히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등 여섯 수가 든 날이 저승 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먼 지방에서까지 많은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성을 밟은 후에는 머리에 이었던 돌을 성 입구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사실 이 성밟기는 단순히 전설을 재현하는 풍습이라기보다는 그 속에 겨우내 얼어 부푼 성을 다지고 유사시에 대비하려는 지혜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단풍은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다.

 공북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섰다. 이곳도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일행 중 이곳을 안 와본 이가 있어 산책도 하고 아이들에게 역사 공부도 시킬 겸해서 다시 찾았다. 동선은 오른쪽 화장실 방면의 산길을 잡아 향청, 소나무숲, 맹종죽림을 지나 객사에 이르는 길로 잡았다.


 

 객사에서 다시 동문인 등양루에 올라 공북문까지 성위를 걷기로 하였다. 향청으로 가는 길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물들었다는 말보다는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단풍나무 몇 그루가 주는 그 붉은 황홀함에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마저 감탄을 한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일제히 휴대폰이든 카메라든 뭐든지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꺼내어 사진을 찍는다. 한참을 지났을까. 단풍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듯 한차례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왔다.


 

솔숲과 대숲에서 푸른 바람을 만나다.

 향청을 지나니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다. 종종 산책을 하는 이와 운동 삼아 이곳을 찾은 주민들뿐 낮은 야산의 깊은 숲은 한적하니 걷기에 좋다. 솔숲의 향기가 끝날 즈음 푸른 대숲이 나타났다.


 

 맹종죽림. 중국이 원산지인 이곳의 맹종죽은 1938년 청월 유영하선사가 이곳에 보안사를 세우고 그 운치를 돋우고자 조성하였다고 한다. 아이들이 대숲으로 일제히 달려간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아이들을 겨우 달래서야 대숲을 떠날 수 있었다.


 

성벽 위를 정성스레 걷다.

 푸른 숲 사이로 다시 붉은 단풍이 보인다. 그 너머 너른 공터에 듬직한 객사 건물이 보인다. 단풍나무 아래에는 샘이 있어 산책에 메마른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을 노래를 부른다. 하나 둘 따라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가을날의 고요한 합창이 되었다.


 

 다시 산길을 잡아 동문인 등양루에 올랐다. 구불구불 이어진 성벽과 고창읍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풍광이다. 담쟁이덩굴이 막바지 가을을 함께 하고 싶은지 성벽에 바짝 붙어 혼신의 힘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지심귀명례.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자기가 난 흙으로 돌아가는 계절이 가을이다. 성벽 위에 오르자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이들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였으나 아이가 도리어 어른을 걱정한다.



 

성벽 위로 어둠이 내려앉다.

 다른 읍성과는 달리 산성처럼 야산에 쌓은 고창읍성은 전망이 유독 시원하다. ‘모양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읍성은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영광의 법성진성과 정읍의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왜구로부터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성의 둘레가 1,680m에 이르고 여섯 군데의 치와 동, 서, 북의 세문이 있고 성 밖에는 해자를 팠다.


 

 이 읍성은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단종 1년인 1453년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성벽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계유년에 쌓았다는 글자가 있는데,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을 담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책인 ‘동국여지승람’이 성종 17년에 나왔으므로 그 전의 계유년인 1453년에 세운 것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여자들이 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성위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밟아 가니 어느새 공북루의 날렵한 지붕선과 성문을 둘러싼 둥근 옹성이 조화롭게 짝을 이룬 모습이 발 아래로 보인다. 이미 어둠은 성벽 위에 앉아 있었다. 어찌 보면 답답할 성 안에서 한적하게 가을을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한 저문 날이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